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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이조참판 증 좌찬성 시는 문절이다. 공은 충효세가에서 태어나 총명호학하였으나 문옹은 공의 신약을 걱정하여 독학하지 않았는데 능히 천여권의 장서를 섭렵하고 높은 학행으로 청호유고를 남기다. 천성이 순인하여 양친에 성효하고 위선에 진력하며 형제가 곤궁할 때 이를 구하고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널리 이웃을 진휼하다.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살때 서기 1906년 면암 최익현의 의병이 곡성에서 행진함에 의거자금을 후원하고 병고로 막하에는 참전하지 못했으나 다음해 정제 이석용이 거의하자 3차에 걸쳐 38량 당시 옥답 19두락 값의 군자를 지원하면서 정제가 전라좌도와 영남일대에 걸쳐 20여인으로 조직한 임자동밀맹단에 동향의 안훈 안재창 조영선 조우식 등과 가맹활동하다. 이 사실은 백년동안 묻혀있다가 서기 2000년 증손 회수가 이석용 의병장의 문집과 불기록에서 그 사실을 밝혀내어 공이 구국활동에 기여한 실적을 인정받아 늦게나마 서기 2001년 건국포장을 봉수하다. 비록 전투에 동참은 못했으나 거재로 의병을 도운 것은 국가가 있어 가정이 있고 민족이 있어 내가 있으니 나의 모든 것이 그대로 나라의 것이라는 투철한 국가의식과 빼앗긴 주권을 기어이 찾고야 말겠다는 구국단원은 총을 들고 적과 싸운 의군이나 군자를 도와 의군이 항전케 한 선생이 어찌 다르다 하겠는가. 또한 이름을 세가지로 변용했고 의병 지원을 가족도 모르게 한 일은 후환을 피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왜경의 추적을 따돌려 우리 의군의 작전을 보호하려는 치밀한 계략이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호시탐탐한 왜경의 의심을 받아 누차 결문을 당했지만 일체를 부인하고 서기 1927년 8월 수 68로 오곡면 덕산리 자택에서 서거하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니 옥천 조씨생은 만기 원기와 평산 신씨생인 영기 형기 현기 선기 택기 등이다. 아아 인과 의로 일관한 공의 거룩한 삶에 찬미의 노래를 부치노니 - 충효의문 후손으로 효우진휼 다했지만 나라 잃은 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