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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이 대패하고 면암과 임병찬 등은 대마도로 압송되고 의병진이 해산되자 향리로 돌아와 석전서당을 개설하여 청년 자제들에게 애국정신과 충절의식을 함양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서기 1918년에 광무황제가 붕어하자 8도의 인사가 통곡성복을 하였는데 흉흉한 금복설을 불구하고 종숙 춘당공 휘 원묵과 함께 옥후산에 올라가 거애성복을 하였고 서기 1939년에는 일제가 동성의 혼인을 허락하고 여서를 친자로 입계함을 허용하며 성씨를 개창한다고 발표하니 공은 분개함을 참지 못하여 당시의 소위 총독부와 경학원과 중추원의 삼소에 송신을 하여 힐책하기를 「사람이 금수와 다른 바는 인륜이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제도를 바꾼다면 이는 인간이 아니고 금수가 되는 것이니 령을 즉시 철회하라」하였다. 이는 아국의 전통문물을 파괴하고 왜이의 풍속과 동일하게 하려는 것이어서 국가의 폐망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공은 저들의 회개응답을 기다렸으나 오히려 이로 인하여 모진 박해가 더해지자 의분을 참을 수 없어 서기 1940년 7월 24일 거실에서 가인들을 내보내고 의관을 정제하여 단좌하고 방민에게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조용히 음독자결을 하고 말았으니 향년 58이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원근사람이 용근하여 사방에서 조곡을 하고 저들 도이도 와서 보고 감탄을 하며 돌아갔다. 천도는 무심치 아니하여 그로부터 5년 후에 마침내 왜노가 이 땅에서 철수하자 오향사림들이 공의 의열을 추모하기 위하여 무산사를 건립하고 매년 상향을 해오다가 재정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