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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배출하면서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주입시켰다. 1939년 3월 16일자로 창씨개명 실시가 발표되자 조선총독부와 경학원과 중추원 방대 서한을 발송하고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말할 수 없는 박해와 감시를 무릅쓰고 일제의 만행에 계속 항거하였으나 전국적으로 수배령이 내려지자 同生(동생)인 裁永(재영)과 浣永(완영)은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滿州)로 逃亡(도망)을 가버리고 선생은 그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우리민족은 망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1940년 7월 24일 음독 자결하였다. 해방 후 뜻있는 유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산사(武山祠)라는 사당을 세워 매년 제사를 모시다가 재정 형편상 중단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석전유고(石田遺稿) 1권이 있다.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