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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건영은 전남 곡성(谷城) 출신으로서 농촌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거유(巨儒)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과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그 때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과 구국을 위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하는 덕행(德行)의 도를 배워 자신이 망해가는 조국을 건지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면암이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순창(淳昌)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자, 면암 의진에 입진(入陣)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과부적으로 의진은 패배하고 면암과 임병찬(林炳瓚) 등은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고 의진이 해산되었다. 유건영은 시세가 의병운동 전개에 불리함을 깨닫고, 농촌에 들어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청년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을 고무하여 장래 민족의 동량으로 성장시킬 것을 꾀하였다. 그후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한일합방'이 되고, 이어서 만주침략을 감행한 뒤 총독부(總督府)는 "내선일체 일시동인(內鮮一 一視同仁)"이니 하는 미명(美名)아래 사실상 한민족을 영원히 말살시킬 음모를 추진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써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추진하였다. 이에 유건영은 극력 반대하여 끝내 저지하겠다는 요지의 항의문(抗議文)을 전달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일제의 모진 박해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끝내 참을 수 없는 울분을 막을 길 없어 차라리 자결(自決)하여 한민족의 기백(氣魄)을 적에게 알리고자 하여 1940년 7월 24일 독(毒)을 마시고 자결 순국(殉國)하였다. 해방 후 곡성(谷城)을 뜻있는 인사들이 그의 공적(功績)을 기리기 위한 무산사(武山祠)라는 사당(祠堂)을 세우고 해마다 순국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