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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건(鄭在健) 선생 유적지 관리번호: 55-1-12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곳은 소송(小松) 정재건(鄭在健) 선생이 평생을 거주하신 곳이다. 정재건(鄭在健) 선생은 1843년 5월 20일 곡성군 입면 약천리에서 태어나 1888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892년 시국이 혼란함을 통탄하고 국정쇄신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다가 옥과와 창평이 합군 되어 향교가 폐쇄되자 유생들을 모아 반대하여 옥과향교가 오늘까지 보존 되었다. 1896년 선생은 기우만(奇宇萬)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유생 들을 모아 나라가 위기에 처할때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는 것은 유생들의 책무라고 하시며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일본군에게 사전에 탐지되어 장성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하늘을 우러러 의롭게 죽을곳을 잃었다고 통탄하셨다. 1910년 8월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상 구차하게 살수없고 맹세코 일본의 세상에 있을수 없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9월 4일에 단도로 오른쪽 목을 세번 찔렀으나 여의치 않자 다시 왼쪽목을 두번찔러 장렬히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