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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송사 기우만 공과 더불어 광주에서 명○하여 맹○짓고 나주로 들어가 곧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세울 즈음 조정의 명령이 내라와 부득기 파병하기는 했으나 그대로 영호를 두루 돌며 일편단심 동지들을 얻기에 애썼는데 그 중에서도 족조 인봉 제량공과 의기가 서로 의기가 맞아 일을 같이 꾀하여 고락을 함께 할 수 있음을 기뻐했었다. 다시 10년을 지나 58세 을사년에 이르러 마침내 망국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는 망 통분함을 더 참을 길 없어 이듬해 4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순창으로 들어가므로 공은 그곳으로 찾아 갔던 바 면옹은 이미 체포되어 갔으며 또 기우만 백낙구 제공을 만나 다시 일어날 것을 기약하고 돌아왔으나 불행히 그들마저 체포되고 말았다. 그랬으나 공은 더욱 더 분격했으며 또 겸하여 애통한 비밀 조서와 함께 총리 호남의병대장이란 이름을 내리므로 12월 11일 인봉공과 함께 저산재실에서 의기를 세워 광훈, 광수, 광채 및 윤영기, 박기덕 제공이 참여했으며 양한규 공과 약속하고 그뭄날밤 남원의 적을 치자했으나 양공이 전사하므로 공도 형세가 불리하므로 물러났다. 다음해 5월에는 능주 왜적, 8월에는 동복의 적을 치고 호남의병장 김동신 공과 응봉에서 만나 서로 맹서짓는 등에 양공의 맹열한 유격전을 적이 가장 두려워하여 놈들은 마침내 공의 녹천본가를 불지르기까지 했었다. 공의 병군이 구례 연곡사에 진친 것은 8월 11일이었고 태극기 위에 不遠復(불원복) 석자를 써서 원수의 기를 세우고서 동으로는 화개동, 북으로는 문수암을 끼고 참모본부를 삼더니 9월 8일 적이 문수암을 불지르고 화개로 갔다 하므로 군대를 두 길로 보내어 적의 머리와 꼬리를 치게 하고 공과 인봉공은 본진을 지키시다가 적의 기습으로 급하게 되자 공은 인봉공과 모든 부하들을 향해 피하라 했으나 모두 의로써 같이 일어났으니 같이 죽으리라하고 안 피했으며 공은 마침내 포연 속에서 적을 꾸짓되 살아서 너희 섬나라를 못 멸했으나 죽어 귀신이 되어 모조리 죽이리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