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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사 - "한말 의병의 정신적 근원" 한말 호남의병장 녹천 고광순 (1848~1907)의사의 정신을 기리는 사당으로 지어졌습니다. 구한말 의병은 전·후기로 구분합니다. 전기는 1895년 명성황후 살해와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고, 후기는 을사조약 체결 후에 일어났습니다. 호남에서 전기 의병은 장성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주도하여 일어났고 녹천은 당시 기우만 의병에 참여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후기 의병을 일으킵니다. 녹천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내건 기치 가운데 하나가 '가국지수(家國之讐)를 갚자'였습니다. '집안과 국가의 원수를 갚자'는 내용입니다. 녹천에게 일본은 국가의 원수이기도 하였지만, 집안의 원수이기도 하였습니다.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과 고인후는 그의 12대조와 11대조였던 것입니다. 왜경은 의병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창평에 있는 그의 집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녹천은 고인후의 11대 종손이므로, 종가와 집안의 유물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된 것입니다. 녹천은 의병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유격전을 펼치다 지리산 연곡사(燕谷寺)에서, 1907년 10월 17일 (음력 9월 11일) 이른 새벽 부하에게 의병명단과 불원복기를 가지고 빠져나가 훗일을 이으라 보내고 의병 13인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고,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선조 고경명의 나이도 60세였습니다. 315년 간격으로 조상과 후손이 똑같은 나이에 의병으로 나섰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것입니다. 이후에도 그의 의병들은 그의 뜻을 따라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불원복(不願復)이 쓰인 국기, 즉 불원복기를 이어 받아 흩어지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매천 황현이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 앞에 시를 남겼습니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한데 (千峰燕谷鬱蒼蒼:천봉연곡울창창) 평생 나라 위해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小蟲沙也國喪:소충사야국상)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戰馬散從禾臥:전마산종화와) 까마귀 떼만 나무숲 사이로 날아 앉는구나. (神鳥齊下樹陰翔:신조제하수음상)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거나 (我曹文字終安用:아조문자종안용) 이름난 조상의 집 그 명성 따를 길 없네. (名祖家聲不可當:명조가성부가당) 홀로 서쪽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 흘리니 (獨向西風彈熱漏:독향서풍탄열루) 새 무덤 옆에 국화가 향기를 품어 올리네. (新墳突兀菊花傍:신분돌올국화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