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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은거하여 동향의 명사인 기암 정공 홍명등 제현과 도의로 사귀며 세월을 보내던 중 당시 잠저에 계셨던 인조께서 선생의 ?인을 흠모하여 가끔 밀방하시어 시사를 의론하고가셨는데 이곳을 유천이라 명명한것도 그때 인조께서 산수의 절승함을 보고 지어주신것이라하며 인조가 말을 맺다는 계마수가 얼마전까지도 남아있었는데 세인이 유선생의 삼고에 비했다. 선생은 그후 인자가 반정을 산뒤에 갑자?변과 정유?변에 거의를 하였으며 나중에 정사원종공신에 책록되어 부친 학봉공에 영의정의 추영이 미쳤다. 선생은 그로부터 내외의 제직을 역임하였던바 인후하면서도 강직한 성격이어서 불의를 보고 참지옷하여 이르는 곳마다 풍성과 업적이 드러났다. 43세가 되던 경신년에는 중국에 종지사의 서장관으로 종행하던중 해상에서 표류하는 화인을 구하여 다려다주어 중조군신의 대환의를 사기도 하였거니와 때마침 명의 태창황제가 붕어하여 국상을 치르던판을 당하여 처면에 빈틈이 없었고 그 치?의 의절을 묻는 중조군신의 말에 막힘이 없이 응답을 하는 선생을 보고 신황제가 감탄하여 우리 국왕께 후한 금백을 상사했으면 선생께도 은화배 일쌍화제4권 홍매1분으로 반?을 했는데 당시 윤치천, 김선원, 김청음 장곡곡, 최누천, 정기옹등 일대 명현들이 제만을 하고 애탁했다. 선생의 후예는 속승해서 명인달사가 많이 나와 가성을 빛내 오늘에 이르니 세인들은 이곳 산수가 종기를 한것이라 하지만 그보자는 제봉선생으로부터 선생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충효대절과 적덕의 심후함이 자손에게 장구한 류경을 함이리라. 이제 선생의 원예인 광수, 재필 2대가 종중의 논으를 규합하여 유천에 유장비를 세우리로 작정하고 멀리 한성까지 나를 찾아와 문을 청하므로 내 사피치 못하고 그 장에 의거 삼가 우와같이 서술하여 경앙하는 뜻을 표하고 아울러 고씨종중의 이곳에서 영원히 번창할것을 기원하는 바이다. 명하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