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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행재소를 지키던 유성용, 이항복, 이덕성의 고집과 전략이 적중하고 성공한것이다. 그 성공은 금선전투에서 전사한 제봉공, 학봉공을 비롯한 애국열사들의 순국한 보상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선조실록, 징비록, 제봉전서, 학봉기석문을 보고 간투린 내용인데 역사학교수인 찬자는 금산전투에서 부자의병이 순국한데이어 준봉공이 진주성 남강전투에서 순국하고 누님은 왜병을 만나 그를 꾸짖고 자정하니 일세를 빛낸 한집의 열열한 충효절의에 감동하고 감복하여 글을 쓱던 손을 떨었다. 그로부터 300년뒤에 일본제국주의가 침범할제 11대 종손인 녹천 고광순공이 의병을 일으켰을때 격문마다 선조 삼부자분의 순국을 들어 용전을 촉구하였다. 그와같이 녹천공으이 1907년 8월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순국하였다는 삿길을 역사는 조선선비의 길로 자랑하고있다. 그때 전사한 녹천공의 시신앞에 당대 문장 황매천이 달려와 我曹文字終安用(아조문자종안용)이요 내같은 놈의 글을 무었에 쓸것인가라고 울부짖던 광경이 연상된 나머지 찬자는 고개를 숙이고 글을 몇번이고 멈추었다가 겨우 마쳤다. 학봉공은 명종 16년 신유 5월 22일에 제봉 고경명공과 부인 울산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효열공 준봉 종후공이 백씨이고 청헌 순후공 해익곡후공과 청사 용후공이 계씨이다. 본관은 장흥이고 자는 의건으로 어려서 지혜가 빼어나 6세부터 학문을 익혀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9세 문과에 급제하여 문망이 남닭랐다. 그런데 성균관학론에 임명되어 뜻밖이었으나 묵묵히 부임하였다. 곧 이어 임진란을 당하여 아버지 추열공 제봉선생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사실 앞에서 소개한바와 같다. 그리하여 학봉공은 인조조에 아들 전천공의 종훈의 공으로 대장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홍문관,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로 추증되고 의열의 시호를 받아 충열공 사우인 포충사에 효열공과 함께 배향되었다. 묘소는 원래 화순의 흑토평에 모셨는데 후에 창평의 수곡리를 거쳐 의열공의 종손이 모여사는 이곳 유천리로 면례하였다. 배위는 의열공보다 먼저 작고한 함평이씨로감사 ?의 따님이다. 6남매를 두었는데 무공랑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