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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으로써 적의 전열을 분산시켰다. 그때 금산에는 방어사 곽영의 진영과 유창로와 안영의 의진이 광주의병과 함께 싸우는데 일진일퇴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난전이 전개되었는데 종사관 유팽로에게 제봉공이 나는 여기가 죽을자리이니 종사관은 나가라고 했다. 거기에서 유팽로가 대장을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고 떠나지 않고 싸움을 돋우었다. 7월 10일 또 난전이 벌어져 끝내 재봉공이 전사순국하고, 유팽로도 안영도 순국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여산의병을 거느리고 싸우던 학봉공이 아버지의 순국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계씨 청사 용후공이 이르기를 중형은 평소에도 안광이 빛나 사람들이 바로보지 못한다고 한 바있는데 그러한 학봉공이 여산의병을 거느리고 왜적을 토벌하니 책에 묻혀 살던 선비같지 않게 용맹스럽고 민첩하여 보는이 마다 놀라고 감탄했다. 그러한 공이 달려와 종횡으로 난병을 헤치고 싸워 크게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끝내는 중과부적으로 공도 7월 10일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때 공이 32세이었다. 임진왜라네서 금산전투가 세차례 있었는데 다른 두번은 김제현감 정담의 웅치전투와 중봉 조헌의지의 금전읍전투였다. 모두 왜병이 호남으로 참략하는 길을 막기위한 전투였다. 의병은 진주성 전투와 하동전투에서 패하고 이충무공의 선전으로 바다길도 막혀서 호남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금산에서도 의병들의 항전으로 역시 호남길이 열리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왜병은 군량비등의 군수물자를 보급할수가 없었다. 결국 평양성까지 올라간 왜병 소서행장 부대와 함경도로 올라간 가등청정의 부대가 선조행재소를 눈앞에 두고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