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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고종 16년 1879년 6월 1일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고 추공병수와 숙덕을 갖춘 전주이씨 평옥의 엄한 훈육을 받으며 꿈을 키웠으며 천품이 영오하고 문무를 겸한 기재로 일찍이 경서를 통달하였고 약관인 1899년에는 무과에 등과하여 참위에 임관되었다. 1905년에 공의 직은 정3품 통정대부 군사사관에 이르렀다. 공은 을사조약후 암암리에 전라도 전역의 항일봉기를 주도하시던 중 체포되어 평리원 재판소에서 15년 유형을 선고받았다. 전남 완도 황진리에서 유형 중 탈출하여 해남 대흥사에 의병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 200여명을 모집하여 해남 영암 일대에서 왜군격퇴의 선봉 역할을 맡아서 활약하셨던 애국지사다. 공은 1908년에 450명을 휘하에 둔 의병사령총장이 되었고 육전은 물론이고 왜의 선박을 남해 우수영에서 격침했던 해전등 수륙 40여회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공은 불행히 1909년 7월 7일 왜군의 기습으로 총상을 입었다. 더욱 통분한 일은 전세의 불리함을 깨달은 지역의병장들이 해남군수 조중관에게 자수 의사를 밝혔을때 수락 조건으로 추기엽 공의 목을 요구하자 자신들의 생명유지를 위하 배반한 막하 부하들에 의해서 1909년 7월 29일 피살의 참변을 당하였다. 조국을 위히여 순국하신 의병장 추기엽공은 자손과 친지 및 향민들의 애도 속에 태어났던 덕곡리의 후산 걸방에 안장되었으니 당시 공이 활약했던 항일활동의 위상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한국 정부는 후일 추기엽 공의 항일애국활동의 사실을 높이 평가 인식하여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였다. 현재 공의 안택은 고향인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 후산에서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306호로 이장하여 안장되었다. 추공은 지금 비록 피세에 계시나 공의 공과 뜻은 개화하여 한국을 주권국으로 부활시켜 세계의 문화선진국으로 부상시켰다.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의 대통령을 선출하여 우리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후손을 위한 미래의 꿈을 설계하기에 이르른 오늘의 한국인은 이 모두가 공을 위시한 애국지사의 공덕임을 가슴속에 새기고 살아가야 할것이다. 왕죽은 왕대밭에서만 자라는 법이다. 공의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지금 국가의 동량이 되어 전도를 개척하는 용기를 키우고 선현의 지혜를 가꾸는데 정진하며 수기치인의 몫을 다하는 창창한 왕죽으로서 교수 판사 기업가 공직자로 각계에서 활동하며 봉사하고있다. 특히 공의 후손 규호는 자랑스러운 기엽공의 위국공덕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길이 전하여 가문의 긍지와 공의 공덕을 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