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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이 힘써 사양하셨다. 을유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귀후서별좌(歸厚署別座)에 임명되었는데 취임하지 않았다.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여러고을이 소문만 듣고서 와해(瓦解)되니 公이 그때에 담양집에 있었는데 개연히 분기(奮起)하여 말하기를 나라종사가 폐허되고 임금이 파천(播遷)하니 신자(臣子)된 도리로 신명을 받쳐야 할 것이다, 하고 처제(妻男) 덕령(德齡)에게 의거(義擧)하기를 힘써 권했다. 그는 곧 충성스럽고 용맹한 장군이다. 드디어 같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군사가 五천이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公이 종군하여 군무(軍務)의 제반사를 주관하셨으며 경상도까지 진군하여 왜적을 막는데 조정이 마침 강화(講和)하여 해산을 권유하니 싸울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金장군이 역적으로 누명을 쓰고 국문을 당하여 엄벌이 公에게도 미쳤다 조정에서 명하여 덕령의 반역한 사실을 공(公)에게 물의니 공(公)은 덕령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절대로 딴마음이 없었음을 극력소명하였다. 고문을 받아도 언어와 기개가 태연자약하니 위관(委官) 김응남(金應南)이 公에게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고통하는 빛이 없느냐 하자 公이 말하기를 「임금이 지척에 계시니 어찌 미천한 신하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게끔 할 수 있으랴」하였다. 곤장(棍杖)이 끝나면 무릎을 모으고 단정히 꿇어 앉으며 서명(署名)을 삼가하고 조용히 추주(趨走)하니 옥(獄)에 이르러 보는이가 모두 장하게 여기였다. 위관이 상계(上啓)하기를 「公은 혹독한 형벌에 임해서도 난언(亂言)이 없으니 충직합니다.」하여 임금님께서 특별히 사면하셨다. 출옥하니 친구들이 다투어 찾아와 위문하자 公이 웃으며 말하기를 「고문받을때 그 고통을 몰랐고 다만 서까래 같은 곤장이 와서 내다리뼈를 치는데 그 소리가 쿵하고 거문고의 굵은 줄소리와 같았다」하니 만좌가 크게 웃었다. 이에 앞서 전라감사 홍세공(洪世恭)이 公과 정송강(鄭松江)이 친함을 미워하여 중상해서 담양옥에다 가뒀다가 곧 의금부로 압송하여 국문을 받게하고 국문이 끝나자 나주옥에 가두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남원(南原)이 함락되자 출옥할 수 있었다. 부인성씨(母夫人成氏)를 모시고 추월산에 피난하셨는데 왜적과 부딪쳐 모부인성씨(母夫人成氏)를 해하려하자 公께서 몸으로 감싸고 母子가 같이 순절하시니 선조(宣祖) 30년 정유(丁酉)(1597) 9월 16일이었다. 그후 담양고을 매곡(同府東梅山)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장사하였다. 광해(光海) 5년 계축(1613)년에 왕명으로 학동리에 효자정문을 세우고 어진선비들이 구산(龜山)에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하였다. 배(配)는 광산김씨 참봉(參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