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page


236page

기념관 밖에 서있는 번역비석과 기념사업회에서 받은 번역본의 비문이 차이가 있어 받은 비문을 올립니다. 세상 어지러움이 오래이면 선비는 스스로가 뜻을 세워 가지 못할까 근심을 하거니와 혹 절조를 자랑할 수는 있어도 지략과 포부를 갖춘 이는 드문데, 그 절조와 포부를 겸해 갖춘 이로 내 친구 중에 고하(古下) 송군(宋君)이 있다. 군의 휘(諱)는 진우(鎭禹)로 호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갑오(甲午=1894) 동학난리 때에는 다섯살이었다. 그때 많은 동향 선배들이 의병을 일으키니, 비록 싸움에는 패했으나, 그 의열(義烈)이 산천에 덮였으므로 군의 뜻하고 향하던 바는 이리하여 일찍부터 싹텄다. 아버지 훈(壎)은 글하던 선비였으므로 군은 그 장점을 이어받아 힘을 쓰던 중에 마침 창평(昌平) 고을 고씨(高氏)가 스승을 청하여 그 사위에게 영어를 가르치니 군도 또한 좇아 배웠다. 고씨의 사위는 곧 김성수(金性洙)군이었다. 두 사람은 깊이 서로 친하여 일본에서 배우고 돌아와서 같이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세우고 또 같이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를 설립했으며, 그밖에도 크고 작고간에 같이 일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중에도 학교와 신문이 가장 이름난 것이었고 또한 군이 가장 힘을 들인 것이었다. 군은 그동안 감옥에 들어가기 두 번, 그때마다 김성수군이 곧 대신 사장이 되어서 군이 옥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군이 배우기는 법과(法科)였지만 더욱 경세(經世)의 방략(方略)에 유의하고 역사를 담론하며 비분강개하기를 좋아했다. 기미(己未=1919) 독립선언 때 군은 중앙학교에 있은 지 이미 3년, 전해에 구주대전(歐洲大戰)이 끝나고 민족자결의 논의가 일어나니 원근에서 은밀히 서로 연락을 하되 모두 중앙학교로 집중이 되었다. 학교에는 숙직하는 방이 있어 군의 거처하는 곳이었고, 김성수군과 현상윤(玄相允)군이 항상 여기에 모였다. 이들이 서로 말하기를 “전쟁은 백인(白人)에게서 일어났으므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적겠지만 이미 ‘자결’이라고 하였으니 이 기회를 타고 일어나면 헛되이 그대로 죽더라도 후일을 위한 길은 열린다”고 했다. 이때 국내는 꼼짝도 못할 형편이라 국외에서부터 거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중의(衆議)였으나, 군은 국내부터 일으킬 것을 역설하여 마침내 모두 군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다. 비밀운동이라 대중을 끌어들일 길이 없었으므로 군은 현상윤군을 중간에 넣어 여러 고비를 겪어서 천도교와 기맥을 통하게 되고, 그것도 중단이 되었다가는 다시 연결이 되곤 하였다. 군은 동지들을 분발케 하여 각 학교에 동지들이 많이 들어박히기에 이르렀다. 이보다 먼저 동경 유학생들이 일어나기를 꾀하여, 이에 은밀히 사람을 서울로 보내어 연활자(鉛活字)를 구하니, 이때에도 현상윤군을 통하여 군이 이것을 알게 되었다. 때는 1월이었다. 2월에 이승훈(李昇薰)공이 정주(定州)에서 올라와 김성수군 댁에 모였다. 군이 거사계획을 알리니, 이승훈공은, “좋소. 내가 곧 돌아갔다가 오리다” 하고 수일 후에 다시 와서 주머니를 털어놓으니 모두 도장이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울 이북의 목사 장로 중 저명한 자는 모두 나에게 거사에 가담할 것을 승낙하였다”고 하였다. 이승훈공은 곧 천도교주를 찾아가서 운동의 합동을 촉구하고 불교계 역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남북으로 연락하는 비용은 대개 김성수군이 대었고, 여러 교파와의 연락은 현상윤군이 맡았고, 상해, 동경, 북미와 연락하는 일, 학생들의 부서(部署)를 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송군이 총책임을 졌다. 3월 1일 선언서가 발표되고, 선언서에 서명한 이들은 모조리 붙들렸다. 군은 뒷일을 맡기로 되었으나, 5일 만에 붙들리어 옥에 있기 무릇 3년이었다. 옥에서 나오자 얼마 되지 않아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군은 개방적이고 호탕하지마는 안으로 행정에서 능하여 신문사가 그 초창기에는 재정이 군색했으나 군이 오래 일을 보면서 넉넉하게 되었다. 잠시 이승훈공을 사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이공이 사면하면서 다시 사장이 되었다. 군은 여러 사람을 대할 때 누구나 공경하고 마음껏 즐겁게 하였지만 가부를 결정할 일을 당하면 곧 굳세게 주장을 하므로, 이로 인해서 남과 거슬리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기미(己未) 이후로 대의(大義)를 잡고 언론으로써 겨레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 중에는 군이 실로 제일인자였다. 신문과 일경(日警)과는 빙탄(氷炭)처럼 서로 용납이 되지 않아 기자들이 자주 붙들리어 갔다. 한번은 군이 경무국(警務局)에 가서 밤늦게까지 다투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외아들이 급환에 걸려 불시에 그만 아들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나와 군과는 처음엔 범범한 사이로서, 군이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로 하와이로 떠날 때 서울역에서 한번 전송한 일이 있었는데 병인(丙寅=1926)년 순종황제 국상(國喪)때 군이 비밀 계획을 세워가지고 어느 친구를 통하여 나에게 의논하여 왔다. 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결과가 평온했건 험악했건 정의(情義)는 마찬가지여서 이때로부터 점점 친교가 두터워졌다. 그 해에 서양인 모(某)가 신문에 기고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계속 힘쓸 것을 열렬히 권고해 왔다. 군은 재촉하여 그것을 게재케 하니 일인(日人)이 미워하게 되어 신문은 정간이 되고 곧 해제되었으나 군은 그로 인해 벌을 받아 해를 넘긴 후에야 풀려 나왔다. 얼마 후 어떤 통신이 만주 만보산(萬寶山)에서 중국인 지주가 한인(韓人) 소작인을 모조리 학살했다고 전하니, 이 통신을 받아 이것을 크게 보도한 신문도 있어서, 이에 민중이 크게 소동을 일으켜 다투어 화상(華商)들을 습격했다. 군은 탄식하면서 “누가 이런 이간(離間)을 하였는가. 이것은 원수를 딴 곳에 두고 공연히 상잔(相殘)하는 짓이다” 하고 급히 실정을 밝히는 글을 신문에 싣는 동시에 화상들을 찾아서 위문도 하였다. 그 뒤 자세한 소식에 의하여 이 사건은 일군(日軍)이 일부러 꾸민 일임이 드러났다. 이충무공의 후손이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위토(位土)까지도 수호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군은 널리 기부를 거둬서 그 문권(文券)을 도로 찾고 제전(祭田)을 더 장만케 하고 현충사(顯忠祠)까지 세웠으니, 무릇 선열의 공에 보답함으로써 민심을 진작하기 위함이었다. 애국열사 유가족의 부양이라든가, 혹은 먼 곳에서 붙들려 왔거나 감옥살이를 오래 하는 동지들에게는 면회를 하고 의복 음식을 차입하는 등, 자상하게 뒤를 돌보기도 했다. 일인(日人)으로 한국일을 맡았던 총독이 전후 5, 6명, 군은 이들과 다투는 가운데 서로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군을 중히 여겨 매수를 하려고 백방으로 손을 써도 여기에 휘어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술 먹은 뒤에는 말이 많고 가끔 자기 자랑도 나오곤 하였지만 군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벌어져서 불꽃이 영(英)․미(美)국에까지 번진 뒤에는 일본의 행패가 더욱 심하여지더니 마침내 신문이 폐간되고 군도 구속되어 20여일을 옥에 갇혔다. 이때 동지 중에는 불근신하게도 적을 위해 일을 하는 자도 나타났으나, 군은 딴청으로 더러운 것을 피하다 못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일인이 항복하기 수일 전, 일제 총독과 그 부하들이 항복 소식에 접하자 황급히 군을 몰래 청하여 치안을 위임하니 군은 이를 거절하고 친구에게 말하기를 “우리 일은 마땅히 우리가 할 것이지 어찌 적의 위탁을 받아 다스릴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일본 항복의 소식이 들어오자 세상 일이 모두 부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군은 전과같이 일체 모르는 체 하다가 1개월만에 국민대회 소집을 계획하고, 이어 민주당(民主黨)의 당수로 추대되어 중경(重慶)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미구에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공이 미국에서 오고 백범 김구(白凡 金九)공이 중경에서 들어왔다. 군의 주장이 더욱 분명해지자 그를 꺼려하던 자들이 이를 갈고 사방에서 일어났다. 12월 28일 임신(壬申)에 미(美)․영(英)․중(中)․소(蘇)는 한국을 몇해 기한부로 신탁통치(信託統治)한다는 보도가 들어왔다. 29일 계유(癸酉)에 김구공을 찾아 거국적인 거부의 방법을 의논하고 돌아온 다음날 30일 갑술(甲戌) 새벽, 군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권총을 갖고 들어온 자들에게서 몇방의 총탄을 받고 숨이 끊어졌다. 이 때 나이 겨우 56이었다. 부인은 유씨(柳氏).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 영수(英洙)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군의 키는 보통이나, 얼굴이 크고 희며, 수염과 눈썹이 적었고, 눈이 길고 끝이 처져 눈꺼풀이 쭈그러졌고, 눈이 가느다란 것 같으나 주위를 둘러 볼 때에는 위엄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난리를 겪고 중간에는 세상일이 비뚤어지고 잘못되었으나 항상 낙관을 갖고, “적의 망하는 것은 서서도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언젠가 김성수군이 나에게, “고하의 말을 믿지 마시오. 서서 기다릴 수 있다 하더니 지금 이꼴이 무엇이오” 하고, 농담을 한 일도 있었지만, 군이 신문에 중국의 현상과 세계의 전도를 논한 것이 20년을 지나서도 맞지 않는 것이 없은 즉, 그 식견의 탁월함이 이와 같았다. 군은 인재였다. 곤란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 지킬 것을 지켜 그 포부를 밀어왔다. 섬 오랑캐가 비로소 놀라 도망가고 이제부터 될듯 될듯이 구름이 일고 용(龍)이 조화를 일으키려는 그 때에 한번 뜻을 펴 보려다가 갑자기 꺾이었으니, 어허, “나라가 장차 곤궁해지겠다(邦國殄瘁)-<詩經․大雅․瞻仰>”라는 시는 주(周)나라 사람이 이미 지었다지만, 그때는 아직 반드시 지금 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허 슬프다. 군이 돌아간지 닷새만에 김성수군이 동지를 모아 양주 망우리(楊州 忘憂里)에 장사를 지냈다. 명(銘) - 아침의 말로 내 근본을 세우고, 저녁의 말로 비류(非類)를 막았도다. 웃고 떠들어도 한계를 넘지 않고, 취해 소리쳐도 그대로 있었도다. 지나기 여러 십년, 만가지 변화를 겪었도다. 팔을 걷고 분해 일어나면, 산과 바다도 떨었도다. 깊은 마음속에 맺힌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이처럼 곧을 수 있었으랴. 우리의 길이 비색한 것을 슬퍼하나, 차마 그대를 글 속의 인물로 만들고 말 수야 있으랴. 단군기원(檀君紀元) 4279년(丙戌=1946) 10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