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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기니 군은 이를 거절하고 지인에게 이르기를 우리 일은 우리가 할 것이다. 어찌 적의 위임으로 다스릴 자 있을 것인가 하였다. 항복이 전해지매 세사는 급격히 부풀었으나 군은 누워있기는 전과 같더니 그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일어나 국민대회의 소집(召集)을 계획하고 이어 민주당의 당수로 추대되어 중경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기치 더욱 분명해지니 기투(忌妬)하는 자 이를 갈고 환기(環起)하였다. 12월 28일에 한년(限年) 신탁통치론이 보도되매 익일에 군은 백범 김공을 찾아 거국(擧國) 거부(拒否)를 책모(策謀)하더니 30일 미명에 군의 침소에 틈입(闖入)한 자 있어 군은 권총 수환에 기절하니 연근(年僅) 56이었다. 부인은 고흥 류씨 형(兄) 자(子) 영수로 후사를 삼았다. 군의 키는 보통이며 얼굴이 풍백(豐白)하고 수미(鬚眉)가 적고 눈은 길게 드리워 끝이 치껴졌으며 가느다란 것 같으나 위엄이 있었다. 군은 약관에 난을 겪고 중간에는 세사 갈수록 그 그릇되었으나 조국광복의 강한 신념으로 일관시종(一貫始終) 낙관하였고 군이 신문에서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將來)를 논한 바 20년이 지나도록 부합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식견이 이와 같았다. 군은 인재라 바야흐로 국척(跼蹐)의 곤경(因境)에서도 오히려 지킬 바를 지켜 경륜(經綸)을 폈으며 마침내 일인(日人)들이 물러가고 무르익는 운증용변(雲蒸龍變)의 호기(好機)를 당하여 한번 굼틀 대사를 이루려다가 거연(遽然)히 꺽이니 어허 시(詩)에 방국진췌((邦國殄瘁)라 하였으되 그때는 나라의 곤궁(困窮)함이 반드시 금일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슬프다. 몰후(歿後) 7일에 김군이 동인들과 함께 양주 망우리에 안장하였다. 銘 朝之言 立吾柢 夕之言 歫非類 笑敖踰 酣號爰在 歷之累紀 載之萬變 握臂憤憤 山海爲顫 芴非結乎至哀 易以貢夫 명(銘) - 아침의 말로 내 근본을 세우고, 저녁의 말로 비류(非類)를 막았도다. 웃고 떠들어도 한계를 넘지 않고, 취해 소리쳐도 그대로 있었도다. 지나기 여러 십년, 만가지 변화를 겪었도다. 팔을 걷고 분해 일어나면, 산과 바다도 떨었도다. 깊은 마음속에 맺힌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이처럼 곧을 수 있었으랴. 우리의 길이 비색한 것을 슬퍼하나, 차마 그대를 글 속의 인물로 만들고 말 수야 있으랴. 단군기원 4279년 10월 일 세움 서기 1966년 11월 일 고하 기념사업회에서 이 곳으로 환장(還葬)하고 원문을 보역 송완빈 서(書)로 이 비를 고쳐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