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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를 위한 단계가 될 것이라 하였다. 이때 국내는 공포 속에 있어 거사는 국외로부터 함이 편하다는 중론이라. 그러나 군은 국내 거사를 역설하여 마침내 모두 군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으며 비밀운동이라 민중을 끌어 드릴 길이 없으므로 군은 현군을 개(介)하여 전전(展轉) 마침내 천도교와 통하게 되었으며 이리하여 군의 힘으로 모두 분발되고 학교 및 각지에 동지들이 밀포(密布)되었다. 이에 앞서 동경 유학생들이 거사를 꾀할 새 역시 그 준비와 국내외 연락 지시등도 군이 주담(主擔)하였다. 2월에 김도태 동지에게 밀탁(密託)하여 정주 이승훈 공을 초청 찬성을 얻고 이공은 서울 이북의 저명한 목사 장로를 규합하였고 이에 앞서 통한 바 있는 천도교와 합동 거사키로 하였으며 한용운 공을 통하여 불교 또한 이에 호응하였다. 이때 남북 각지의 출비(出費)는 대개 김군이 맡고 각 교파의 연락은 대개 현군이 맡고 그 밖에 민족대표의 구성 상해 동경 북미 등 해외 각지와의 연락 호응과 학생의 부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이 총책임을 맡았다. 실로 중앙학교 숙직실은 3.1운동의 산실이오. 군은 이 운동의 조직자요 주동인물이었다. 3월 1일 선언서가 발표되고 서명자가 체포될 새 군은 후사를 보살피기로 되었으되 5일 만에 잡혀 재옥(在獄) 무릇 3년이었다. 출옥 미구(未久)에 동아일보 사장이 되니 군은 천성이 개상(開爽)이나 안으로 행정에도 능(能)하여 신문이 처음은 재정이 궁하였으나 군이 오래 담당하면서 넉넉하게 되었다. 군은 접인에 고루 공경과 환대를 다하였으나 한 번 가부를 결(決)할 일에는 소신을 굽힘이 없어 이로써 남과 거슬리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기미 이후로 대의를 잡아 언론으로써 민족을 빛낸 이로는 군이 실로 제1인자였다. 동아일보와 일본 법리(法吏)와는 서로 빙탄(氷炭)이라 기자들이 자주 구금되더니 한번은 이일로 경무국과 다투다가 밤늦게 돌아온 즉 아들이 급환이라 손볼 겨를도 없이 참척(慘慽)을 당하였다. 나와 군과는 군이 범태평양 회의로 하와이로 떠날 때 송별한 이후 병인년 순종 대상에 군이 비밀 계획을 세워 내게로 알려오니 모사(謀事)는 이뤄지지 않았으되 이로부터 친교 점밀(漸密)하여졌다. 이 해 미(美) 네이숀지 주필 기고로써 한인의 분기를 격려하매 군이 이를 게재케 한지라 신문은 정간되고 군은 형을 받아 익년에야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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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외전(外電)이 전하기를 만주 만보산의 전주들이 한인 전호(佃戶)를 오살(鏖殺)하였다 하니 이를 받아 크게 보도한 신문도 있는지라 민중이 다투어 화상(華商)을 습격할새 군이 탄식하여 가로되 이 이간을 하는 자 누구인고 이는 구적(仇敵)의 계략에 우리가 상잔함이라 하고 급히 실정을 밝혀 신문에 싣고 한편 화인(華人)들을 위유하더니 뒤에 진상이 알려지매 과연 일군의 위계이었다. 이충무공의 후손이 빈한하여 묘소의 관호마저 어려운 형편이라 군이 널리 기부(寄附)를 얻어 문권(文券)을 되찾고 제전(祭田)을 장만하고 현충사를 세우니 무릇 선열에 보공하여 민심을 진작함이었다. 지사 협렬(俠烈)의 유족 부양과 원체(遠逮)구계(久繫)된 이의 면회와 의량(衣糧) 제공은 반드시 곡진(曲盡)히 하였다. 일인총독이 전후 5~6인으로 군은 이들과 다투는 가운데 알게 되더니 모두 군의 역량을 중히 여겨 회뢰(賄賂)로써 꺾으려 하되 백방에 흔들리지 않았다. 주후(酒後)에는 말이 많고 때로 자예(自譽)도 서슴치 않았으나 아는 이는 이를 과하다 말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열리고 불꽃이 영미로 번진 뒤로 일본의 음위(淫威) 날로 심하여 신문은 폐간되고 군도 구금되였었다. 제2차대전 중 5년여 군은 종용자득 오염을 피하여 끝내 침구를 쓰고 누워 사람을 대하지 아니하였다. 일본 항복(降伏) 수일 전에 총독 이하 황구(慌懼)하여 몰래 군을 청하여 치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