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page


205page

김용규는 1919년 3월 6일 밤 전남 광주군(光州郡)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 남궁혁(南宮爀)의 집에서 김강(金剛)·강석봉(姜錫奉)·김복현(金福鉉)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김용규는 동지들과 함께 김강으로부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광주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제안에 찬성하고 그 실천사항과 역할분담을 논의하였다. 이날 결의 내용은 첫째 3월 8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펼칠 것, 둘째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인쇄는 시내 조선인 청년에게 담당시킬 것, 셋째 인쇄용지 1만매는 강석봉에게 구매를 담당시킬 것, 넷째 인쇄용기는 숭일학교(崇一學校) 소장 등사판을 사용할 것, 다섯째 최병준(崔丙浚) 등은 숭일학교 학생을, 김태열(金泰悅)은 광주보통학교 학생을 각각 권유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가시킬 것 등이었다. 이후 김용규는 동지들과 함께 남궁혁의 집에서 직접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를 담당하였다. 엄중한 일본경찰의 경계 등으로 인하여 인쇄소를 광주면(光州面) 수기옥정(須奇屋町) 김언수(金彦洙)의 집으로 이전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시 3월 8일 광주면 향사리(鄕社里) 최한영(崔漢泳)의 집으로 이전하여 다음날 9일 저녁까지 최정두(崔正斗)가 집에서 가져온 등사판 등을 이용하여 독립기(獨立旗), 구한국기(舊韓國旗), 경고문(警告文) 등 수천 통의 인쇄를 마쳤다. 이날 저녁 동지들과 회합하고 3월 10일 오후 3시 30분부터 광주 대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개시할 것을 알리고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물 배포, 집합시간 고지, 운동참가 권유에 관해 협의하였다. 김용규는 부동정(不動町) 방면 및 남문통(南門通) 일대를 담당하고 김종삼(金鍾三)은 당일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개시를 알릴 것 등을 협정하였다. 그리고 당일 배포할 독립선언서 등을 분배하고 흩어졌는데, 김용규는 독립선언서 인쇄물 50통을 받았다. 드디어 거사 당일 예정된 시간이 되자 김복현 등은 광주교(光州橋) 아래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 나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의 개시를 알렸다. 이에 호응하여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군중들과 함께 시장을 나와 숭일학교 학생 및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합세하였고, 다시 시장에 모여 있던 수백 명과 합쳐 그 수가 1,000여 명을 넘었다. 이들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거나 모자 등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장을 출발하여 서문통(西門通)을 경유하여 우편국 앞을 쇄도하는 등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김용규는 이날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곧바로 몸을 숨겨 일경에 체포되지 않았다.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 궐석(闕席)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그후 1923년경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