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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 양진여 의병장은 1908년 7월 20일경 광산군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박성일, 김익오 등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였다. 11월중 광산군 대치산에서 일본 수비대를 맞아 혈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4일에 양진여부대를 포함한 의병연합부대 300여명이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크게 패배하였다. 1909년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강판렬부대 및 전해산의 의병부대 270명과 더불어 장성, 담양을 습격하고, 뒤이어 일본군의 본거지인 광주를 공략하려고 하였으나 적이 대병력를 배치하여 전력을 정비하므로 중단한 바 있다. 같은해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잡히고 말았다.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같은해 .1910년 5월 30일, 일제에 의해 교수형을 받고, 48세 짧은 생애를 마쳤다. 출처 : 한국매일뉴스 南道 인물(126)-부자지간의 항일 투쟁...광주, 한말 의병 양진여와 아들 양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