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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 묘정비(褒忠祠 廟庭碑) 이곳은 제봉(霽峯) 고경명(髙敬命) 선생과 그의 두 아들인 종후(從厚), 인후(因厚) 및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두 분을 받드는 곳이다. 제봉은 자는 이순이오 제봉은 그의 호다. 1533년에 출생, 1558년에 문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중앙에서 정언(正言),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다가 중간에 벼슬을 그만두고 오랜동안 학문을 탐색하여 시문을 저작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581년에 중국의 사절을 마중하는 데에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왕에게 알려져서 칭찬을 받고 벼슬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특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강직한 성격이 관직생활에 맞지 않아서 또 그만두었다가 뒤에 다시 승문원판교(承文院判敎),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냈는데 당론을 달리하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켜서 또 시골로 돌아오고 말았다. 인진왜란이 발발하여 왕이 피란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아들 종후, 인후와 함께 의병을 일으컬 것을 결의하고 이해 5월에 담양에서 첫모임을 가졌는데 유팽로와 안영이 선생을 대장에 추대하니 선생은 늙은 몸임에도 이를 사양하지 않고 앞장에 서서 도내에 격문을 보내어 많은 군중을 얻었다. 당초에는 이 군대를 거느리고 곧장 임금이 있는 곳으로 달려 가려하였으나 이때에 호남지방에 적군이 침입하였고 지방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으므로 먼저 본도를 구하기로 방침을 바꾸고 7월에 금산의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관군인 방어사와 좌우익을 형성하여 협공하기로 약속하고 선생은 직접 수백명을 데리고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면서 직접 북채를 잡고 전투를 지휘하였고 군중도 힘을 다하여 맹공격을 개시하여 토성을 향하여 포위망을 좁히며 들어가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날이 벌써 저물어가고 약속했던 관군이 오지 않아 완강히 저항하는 적의 성을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일단 철수하고 이튿날 8백명의 군대를 보내어 도전하였더니 적은 성을 다 비워놓고 전군이 쏟아져 나와서 먼저 사기가 약한 관군을 향하여 집중공격을 가하니 관군의 장수가 달아나고 군대가 괴산되었다. 선생은 단독으로 적과 싸울 각오를 세우고 군대들에게 결사적인 정신으로 임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무너진 것을 본 군중들은 사기를 잃어 더 도전할 수가 없었으나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고 물러서지 않고 “나는 이미 목숨을 바칠 것을 각오했지만 두분은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라”하였으나 두 사람은 오히려 선생을 엄호하며 함께 싸우다가 다 같이 전사하고 말았다. 둘째 아들 인후도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일전을 재개하려 하다가 또한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60세였다. 맏아들 종후는 아버지와 아우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낸 뒤에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복수 의병장”이라 자칭하고 경상도로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진주성 싸움에서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장렬한 순절을 이루었다. 재봉선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 나라에서 공조참의(工曹參議) 겸 초토사(招討使)의 관직을 내렸고 금산에 출전할 때에는 예조판서에 승진시켰다. 순절한 뒤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추증하고 포충사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고 뒤에 충열(忠烈)의 시호를 내렸다. 종후와 인후는 모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을 지냈었다. 뒤에 나라에서 종후에게 이조판서와 효열(孝烈)의 시호를, 인후에게 예조참판과 의열(毅烈)의 시호를 추증하고 유팽로에게 사간(司諫), 안영에게 장악첨정(掌樂僉正)을 추증하고 함께 포충사에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고정주(高鼎柱)가 지어 1933년에 세운 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분부를 받들어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 요약 편술한 이 비를 따로 세워 후세에 전한다. 1979년 월 임창순 지음, 김병남 씀, 전라남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