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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성균관좨주(議政府右議政兼成均館祭酒) 송환기(宋煥箕)는 비문(碑文)을 짓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집의 겸 경연관(司憲府執義兼經筵官) 송치규(宋穉圭)는 비문의 글씨를 쓰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吏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이계원(李棨源)은 전액(篆額)을 하다. 아! 생각건대 이 웅양(熊陽)의 포충사(褒忠祠)는 바로 대사헌(大司憲)에 증직(贈職)된 이 선생(李先生)을 배향(配享)한 곳이다. 영조(英祖) 4년인 무신년(영조 4, 1728년)에 공(公)이 역적(逆賊) 정희량(鄭希亮)의 난리를 당하여 의(義)를 위하여 죽은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조정(朝廷)에서 그동안 포상하는 은전(恩典)을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마침내는 사원(祠院)에 사액(賜額)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아! 성대한 일이로다. 공의 휘(諱)는 술원(述原)이요, 자(字)는 선숙(善叔)이며, 연안(延安) 사람이다. 8대조(代祖)인 충간공(忠簡公) 숭원(崇元)은 우리 성종(成宗) 임금을 섬겨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대총재(大冢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들이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있었다. 할아버지 휘 중길(重吉)은 숙종조(肅宗朝)에 부사(府使)의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휘 연웅(延雄)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온화하고 양순(良順)하다는 것으로 종족(宗族)에게서 칭찬을 들었다. 그 일로 인하여 거처하는 마을을 ‘화동(和同)’이라고 불렀다. 연웅에게는 아들이 5명이 있었는데, 공은 네 번째 아들이 된다. 공은 어려서부터 매우 재주와 지혜가 있어서 향당(鄕黨)에서 이름이 났었다. 무신년(영조 4, 1728년)에 청주(淸州)에서 역적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주현(州縣)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거창(居昌)의 수령(守令)인 신정모(申正模)가 갈팡질팡하며 어떻게 손써야할지를 몰라서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한 사람을 얻어 그에게 제반 군무(軍務)를 맡기려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두 공을 추대(推戴)하여 고을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공이 분개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충간공 때부터 대대로 충성되고 참된 것에 돈독하였다. 지금 내가 듣자니 서원(西原)의 절도영장(節度營將)이 적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어떻게 부끄럽게 향소(鄕所)의 일을 맡아보던 사람으로 피할 것을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그날로 현(縣)에 들어가서 제반 군무를 다스렸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정희량, 이웅보(李熊輔), 나숭곤(羅崇坤), 세 역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이르자 관장(官長)은 도망하여 숨고 서리(胥吏)와 장교(將校)는 배반하여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향리(鄕吏)인 신극종(愼克終)과 함께 맨주먹으로 적들을 방어하다가 마침내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공이 적들을 향하여 크게 꾸짖기를, “이 군사들은 무슨 군사들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전쟁을 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한 것인가? 너는 충현(忠賢)의 자손으로 감히 반역을 하였으니 내가 어떻게 너를 따를 수가 있겠는가? 나는 너의 살을 씹어 먹을 수가 없으니, 속히 나를 죽여라! 속히 나를 죽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흉적(凶賊)의 칼날이 어지럽게 공에게 가해졌으나 꾸짖음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다가 운명(殞命)하였다. 이날이 3월 23일이다. 이때에 자줏빛 나는 번갯불이 침류정(枕流亭) 위로 섬광(閃光)을 뿜으니, 고을의 사람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겼다. 공의 아들 이우방(李遇芳)이 시신(屍身)을 안고서 집에 이르러 겨우 시체를 염습(殮襲)하여 관(棺)에 넣어 안치(安置)한 뒤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관군(官軍)에게 나아가 스스로 전봉(前鋒)에 속하겠다고 청하였고, 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았을 때에 주장(主將)에게 손수 그의 머리를 베고 창자를 도려내고 간(肝)을 씹도록 해주기를 청하였으니, 공은 아들이 있다고 할 수 있겠구나! 성상(聖上)께서 공이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하여 죽은 탁월한 일에 대해 듣고 크게 감탄하여, 곧바로 조제(弔祭)를 명하였고 비로소 중승(中丞 : 사헌부집의)을 증직하였으며 특별히 사당(祠堂)을 건립하도록 허락하였다. 또 대신(大臣)의 말로 인하여 하교(下敎)하기를, “이술원(李述原)은 먼 시골의 보잘것없는 한 낱 공조(功曹 외읍의 하급관리)로서 능히 안고경(顔杲卿 : 당 현종 때의 충신)의 일을 힘썼으니, 특별히 헌장(憲長 : 대사헌)을 증직하여 내가 그의 충절에 대해 추념(追念)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성조(聖朝)에서 공을 존숭(尊崇)하여 보답한 것이 이때에 더욱 지극하였다. 공이 사망한지 8년 뒤인 을묘년(영조 11, 1735년)에 서원(書院)을 설립하자는 의논이 호령(湖嶺 충청도와 경상도)의 사림(士林) 중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여러 사람이 일제히 소리를 내며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년(영조 13, 1737년)에 사당의 모습이 새롭게 되자 그곳에 사액해 주기를 청하니, 하비(下批)하기를, “지난번에 사당을 건립하라고 명한 것은 뜻이 대체로 충절에 대해 포상하는 것이었으니, 어째서 석 자(字)를 거는 것에 대해 아끼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오년(영조 14, 1738년) 가을에 정성껏 화려한 의식(儀式)를 행하고 무수히 많은 선비와 벼슬아치가 누구인들 기뻐하지 않겠는가? 무릇 사당과 서원의 설립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첨망(瞻望)하여 흥기(興起)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웅양에 이 서원이 있는 것은 더욱이 어찌 풍교(風聲)를 수립하여 세교(世敎)를 돕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서원에서 향사(享祀)를 받은 것이 지금 몇 년이 되었다. 영남(嶺南)의 장보(章甫 유생)들이 비로소 이에 마침내 비석을 세워서 장차 일의 시종(始終)을 기록하고 이어서 당시에 임금께서 사액한 은덕(恩德)을 선양(宣揚)하기 위하여, 외람되게도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의 위엄 있고 당당한 절의(節義)는 하나같이 당(唐) 나라의 안 상산(顔常山 : 안고경)과 같으나 도리어 말할만한 직책 없이 절의를 지켰으니 그 죽음이 더욱 탁월함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맏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의리로 그의 충성스럽고 굳은 절의를 이어갔으며, 또 종질(從姪) 우태(遇泰)가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을 붙잡아 포증(褒贈)되는 일까지 있었으니 또한 어찌 예사로울 뿐이겠는가? 지난번 군탄(涒灘 : 신(申)의 고갑자)의 구갑(舊甲)이 돌아왔을 때를 당하여, 정종대왕(正宗大王)께서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려서 추모하는 감회와 충절에 보답하는 뜻을 깊이 나타내셔서 직접 공의 제문(祭文)을 지었는데, 거기에 ‘사당에 나아가서 제사하고 녹(錄)이 후손(後孫)에게 미쳤으니, 아! 양양(洋洋)한 영령(英靈)이 응당 한량없이 감격하여 목메어 울 것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다. 예전에 사당과 가까운 곳에 살았고 남은 행적(行蹟)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무릇 타고난 천성(天性)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지나면서 어떻게 근심스러워 두렵고 슬퍼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서원에 들어가서 이 당(堂)에 오르는 사람이 만일 그날의 일을 상상하게 된다면 감정이 격렬히 일어나고 의기가 북받쳐 원통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충절과 의리로써 서로 고무(鼓舞)하여 힘쓰게 한다면 거의 우러러 의지하며 존경하여 받드는 실질을 얻어서 성조(聖朝)에서 표충(表忠)하는 법을 널리 받들어 행할 수 있을 것이니, 무릇 모든 군자(君子)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숭정기원후 세 번째 정묘년(순조 7, 1807년) 10월 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