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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유학자로 추앙을 받게되었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에 비분강개한 장군은 쇄신 구국할것을 결심하고 기삼연, 전수용, 김태원, 심남일장군등과 맹약한후 용진산을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우국충정에 불타는 제자들과 청장년 800명을 규합하여 삼대장에 추대된 장군은 선봉장 박일동, 엄석훈, 중군장 양동환, 좌익장 정만선, 우익장 조만길, 포대장 김봉선, 서기 이재훈, 군량조달 문장환등으로 손자병법의 시계편에 의거 군률을 정비한후 용진산작전을 필두로 성문산, 유덕산작전, 담양 무등촌작전에서 왜장 길전을 사살 결사대조직으로 지도에 있는 적의 해눈본부격파, 유격전개로 나주, 함평, 무안, 완도, 해남, 영암지방의 노획등 혁혁한 전공을 남기었다. 그러나 국운을 어이하리. 왜병의 세력은 날로 창궐하여 마침내 나라를 잃게 됨에 장군은 뜻한바 있어 의병을 해산하고 해외로 망명 독립투쟁을 결행하였다. 한편 왜병은 전국에 이장군 체포령을 내리고 장군의 부인 오대명여사와 가족을 장성 홍정현병소에 감금 2년간의 옥고를 치루게 했다. 망국의 한을 품은 장군은 군산, 청진을 거쳐 국경선을 넘어 만주, 노국, 간도등지에서 조국광복을 꾀하였으나 국제정세에 휘말리어 국내로 잠입 충남 금산을 무대로 제자들을 모아 민족정기 부식에 전념중 1957년 한 많은 일생을 마치시었다. 거룩토다. 민족의 태양이시여! 장군의 충절과 문행은 비길 바 없도다. 나라위해 바친 일생 몸은 비록 가셨으나 오리려 살아있도다. 청사에 길이 빛날 장군의 위훈이 광주지, 나주지, 호남삼강록, 한국독립사, 한국근대사 연구론집, 장군의 문집초고등의 문헌에 역력히 입증 되고있다. 장군의 뜻이 이루어져 조국광복 30주년을 맞은 유적지의 하늘 아래서 정부당국의 위인 선열을 위한 특수시책에 의하여 건립된 의적비를 우러러보며 우리 겨레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애국심을 불러으리킨다면 이는 분명 국민교화의 목탁으로서 조국통일에의 지름길이 될것이오 나아가 장군의 불명의 영령에 본은의 길이되리라 믿으며 이에 명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