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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어등산을 바라보며 우뚝선 의병장 김태원장군은 호남의 산과 들을 義鄕(의향)으로 다시 피워낸 조말 항일정신의 표상이다. 장군의 본관은 경주요 이름은 준과 태중이며 호는 죽봉 태원은 자이다. 1870년 나주에서 태어나 함평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이 출중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굳건한 기상과 정의감이 몸에 밴 장군은 일찍이 동학농민혁명에 투신했고 그후에도 사회적폐단을 바로 잡는데 앞장섰다. 국권을 빼았기자 장군은 김돈 등 동지들과 상의한 후 1907년 10월 아주 청봉율과 함께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 회맹소의 선봉장을 맡았다. 구례 문수사 전투에서 크게 이긴 장군은 기세를 몰아 고창, 법성포, 장성, 영광, 함평, 담양등지를 차례로 점령하며 반일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특히 1908년 설날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강력하기로 기록될 쾌거를 거두었으며 장성토촌전투의 빛나는 승리로 호남의병의 이름을 전국에 떨쳤다. 의병장 기삼연의 순국을 전후하여 장군은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독립 동생 율과 각각 수백명씩의 군사를 이끌고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죽봉부대를 참봉진 청봉부대를 박사진이라 불렀다. 죽봉장군은 지략에 감복한 의병들과 애민정신을 흠모한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호남 각지에 수십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호남의병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자 간담이 서늘해진 일제는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혈전을 계속하던 장군은 1908년 광주 어등산에서 중무장한 특설순사대에 포위되어 끝까지 맞서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김해도를 비롯한 수십명의 의병들도 함께 산화하였으니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죽봉이 순국하기 한달전 피체되었던 청봉마져도 장군의 시신을 확인시킨 일본군경에 의해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형제의 의로움은 대숲의 청청함이 쌍봉에 우뚝 솟음과 같으니 진전 하늘이 낸 충신이다. 김태원의 부인 낙안 오씨도 어린 남매를 키운후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며 남편의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이 어찌 고의충절이 아니겠는가 죽봉 청봉 일가는 마땅히 호남제일 의가로 기려야 할것이다. 정부는 한말 의병장 김태원 김율형제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ㅏ였다. 이에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임의 넋을 기리고 정의와 자주정신을 영원한 귀감으로 삼고자 김태원장군상을 다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