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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거의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왜경에 위장침투 의병에게 무기와 정보를 제공하다가 탄로되자 재빨리 그곳을 탈출 부친의 막하에 들어가 훈련대장이 되셨다. 이듬해 서기 1908년 4월에는 추거에 따라 독립부대를 창설 전해산 부대와 합세하여 동복 화순 곡성 담양 등지의 왜군을 공격하여 많은 전적을 올렸다. 동년 11월에는 200여 명의 정예의병을 거느리고 부친과의 연합작전을 수행하여 광주수비대와 접전 대승하였고 전후 3년간에 걸쳐 도내 각지를 전전하여 사자분신의 혁혁한 전과를 세웠으나 원통할손 일제의 소위 호남의병대 토벌작전을 만나 1909년 12월 24일 전북 남원군 통한면 도통리에서 왜군대 부대와 교전 중 피체되어 1910년 8월 1일 대구형무소에서 향년 27세를 일기로 형사하시니... 부자가 2개월의 간격을 두고 순절하신것이다. 묻노니 망국의 한이 서린 한말 정복자의 말발굽 소리만이 이땅을 휩쓸고 있을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위하여 대한제국만세를 외치며 쓰러지는 피의 절규에 행여 귀를 막고 대문을 닫아건 망패의 비정은 없었던가 우리는 이 두 분 부자의병장의 절륜의 애국충절에서 인생의 관성을 넘어선 인간 의지의 위대한 현시를 보았고 이곳은 한날 인신의 영역이 아닌 민족기사의 성지로서 길이 숭상되고 경배되어야 할 버젓한 당위를 갖는다. 광복후 서기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으며 공의 위업을 기리는 첨종제현의 뜻을 모아 금사일용군의 효애와 정성으로 이 비를 세우다. 서기 1983년 11월 일 흥성인 장재철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