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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의 독립운동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회자되듯이. 예로부터 광주-전남은 충절과 의리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19세기 말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광주전남의 동학농민운동과 의병들의 항쟁이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라성 같은 의병들이 수없이 일어나 하늘같은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져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일본의 식민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광주-전남지역은 의병항쟁의 중심무대였으니, 1908년에는 전국대비 교전 의병수의 24.7%였고 1909년에는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에 일제는 이른바 '남산폭도대토벌작전(1907.9-10월)'을 실시하여 수천명의 광주-전남 의병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거나 체포함으로써 식민화의 제물로 삼았다. 1910년 경술국치 당한 후에도 광주·전남인들은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광복을 도모하기 위한 독립의군을 자처하며 반투쟁을 전개하였다. 비운의 황제 고종의 승하를 계기로 3·1운동의 도도한 함성과 만세시위는 광주-전남의 산과 들에 메아리쳤고, 일제의 잔악무도한 침략을 뒤엎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세계인을 놀라게 하였다. 10년 뒤, 광주-전남의 저항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원제의 무자비한 식민정책에 저항하여 전국을 뒤흔들었으니,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나주와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식민지 해방을 외치며 전국 각지와 해외로 확산되었다. 약 5개월 동안 약 200개 학교 5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2천여 명이 구금되고 퇴학과 정학을 당한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독립운동이었다. 이를 전후하여 광주·전남인들은 민족의 대동단결을 주창한 신간회운동을 비롯한 농민·노동·청년·여성·문화·종교운동을 통해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을 거부하고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1945 을유년, 천신만고 끝에 나라를 되찾았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다시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부여안은 지 70년, 세기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오늘 점차 퇴색되어가는 자주독립정신을 재 조명함으로써 우리 선열들의 돌올한 희생을 되새기고, 나아가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독립운동기념탑을 여기에 세운다. 이제 김구 선생이 그토록 소망했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광주·전남의 정의로운 기운을 결집하여 빼어난 통일문화국가의 횃불로서 인류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자. 2014년 광복절 순천대학교 사학과 홍영기 짓고 금초 정광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