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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압제와 속박에 사느니 오히려 대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뿌리자는 기치 아래 광주 3.1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모진 옥고를 치르신 고 최현숙 여사는 1904년(호적상 1903) 1월 27일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후에 광주읍 양림정 145번지)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던 부 탐진 최공 명환 선생과 이군분 여사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나셨다. 유시에는 막동 수피아 재학 시는 수향이라는 이름하였으며 정신학교 시절 현숙이라 개명하였다. 최명환 선생은 일제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강직하였으나 자녀의 교육에는 다소 개화된 사상을 갖으셨기 때문에 최여사는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에 서울 정신여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여사는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 박애순 진신애 선생의 교육과 감화로 대한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교육 계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통감하고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 발발 직후 동 선생들의 지휘로 동교생 홍순남 박영자 최경애 양태원 등과 극비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장소에 운반 은익해두고 거사일인 기미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광주교아래에서 운집한 천여명의 군중을 선두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작은 장터 서문통 우편국 본정 북문 등지에서 가두시위를 감행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었는데 왜경에 체포된 뒤에도 경찰서 전정에서 만세를 고창하였고 일경의 취조 중 당돌하게도 주동자는 나다고 대답하는 등 기개를 보이다가 목봉으로 두부 등을 구타당하는 등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무렵 堀勘次郞(굴감차랑) 검사에 의하여 구속 기소되어 1919년 4월(2년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으시니 최여사는 광주 3.1의거의 최연소 옥고지사인 것이다. 최여사는 나라가 독립하려면 우매한 백성을 계몽하고 청소년들을 육성하여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1922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수피아여학교에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