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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술(吳成述) 의병장 오성술 의병장은 1884년 전남 광산(현재의 광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본관은 나주로 본명은 인수, 자를 성술, 호를 죽파라 하였습니다. 참봉이었던 아버지 오영선은 마을에서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분으로, 외아들 오성술 의병장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거할 것을 결심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기금을 마련하여 김태원 의병부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1906년 최익현 선생의 구국 의병 항쟁을 주창하는 강회에 참석 의병창의를 결심했다. 귀향한 오성술 은 부친에게 군자금 조달을 요청해 무기를 구입하고 동지 200여 명을 규합 1907년 2월 용진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나주 출신의 의병장 김태원(金泰元)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김태원의 의진은 1908년 1월 창평(昌平)의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지휘관 요시다를 비롯해 여러 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해 4월 무등산전투에서 김태원이 죽자 의진을 수습해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1908년부터 의병에 대한 일본군의 대대적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오성술은 전남 광산군 석면산 전투, 함평군 대명동 전투, 고막원 헌병분파소 습격, 나주시 거성동 전투 등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수많은 유격전을 전개했습니다. 1909년 7월까지 유격전을 통한 의병 투쟁을 벌이던 그는, 나주 용문산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세우고, 호남의병부대의 진압을 위해 구성된 일본군 영산포 헌병대와 결사항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8월, 패전과 동시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강도죄와 살인죄에, 방화죄까지 덧씌워져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이날 순국했습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국가보훈처는 2000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