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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은, 공주를 진원지로하여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저항운동으로서 3.1운동과 함께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이는 1929년 11월 3일 일본의 명치절에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대대적으로 전개했던 항일시위운동에서 발발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파급되어 곳곳에서 학생시위와 동맹휴학의 방식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총 300여교 이상이 참가했고 학생수만으로도 당시 전체학생의 절반이 넘는 5만4천명이 참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성진회'와 '독서회', '소녀회'등 비밀결사 조직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주도된 운동이었다. 전남사범학교 학생들의 경우는,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고 지역별 인재로 선발된 적은 학생수, 관비학생으로 졸업후 교직에 의무복무해야하는 등의 제약 조건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물론 비밀결사등을 통하여 조직적인 저항의 기치를 높였다. 재판기록등에 나타난 '성진회' 회원 13명은 졸업생으로 일선 현장에서 재직 중이었는데 이들은 강해석, 김기주, 김종선, 김태영, 김필재, 노근후, 박무길, 이동선, 임종대, 정귀석, 최상호, 하의철 등이다. '독서회' 회원으로 재판에 회부된 25명의 재학생은 강달모, 강문범, 강유진, 곽찬신, 김동규, 김일제, 김재웅, 김종화, 남일남, 문영열, 박기순, 박노기, 박인배, 박중진, 박창하, 송동식, 신명철, 신류근 이경련, 이덕우, 이신형, 이영백, 이춘수, 홍귀주, 황상남등이다. 졸업생들은 재직 중에도 재학생들과 연대를 통해 긴밀히 활동하였으며, 재학생들도 당시 총99명중에서 38명이 퇴학을 당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옥고를 치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이래 추걱된 항일운동의 활화산으로서 전 민족의 호응을 받았고 세계를 놀라게 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우리의 독립정신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큰 원천이 되었으며 민족혼을 되살려 우리의 자존과 긍지를 되찾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