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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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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대거 향응하여 자못 지세충천한 의군으로 홍주성을 총공격하니 왜병들은 예산방면으로 도주하고 동년 5월 19일에 홍주성을 점령하니 군세가 대진하였다. 일제는 홍주성을 탈환하기위하여 익일부터 10일간 수회에 걸쳐 공주경무고문지부의 경찰대, 수원헌병분대의 헌병대, 서울경무고문부와 공주진위대의 경찰대, 서울헌병대의 헌병등이 막강한 화력으로 내습하였으나 충천한 창의군의 사기에 눌려 패퇴하고야 말았다. 일군은 패전만을 거듭하자 통감 이등박문은 주답군사령관에게 출병명령을 내리매 일군사령관 장곡천은 재경성 남부군 수비대 사령관 동조 소장에게 필요한 병력을 홍주로 파견하라고 훈령하여 보병 2개중대로 일개 지대를 편성하고 기관총 2문에다 전주수비대 보병 1개소대를 합세시켜 동월 30일에 총공격을 감행해오니 실로 일제가 조선에 주둔한 전병력을 총동원한 셈이었다. 이에 맞선 공의 창의군은 주야를 가리자 아니하고 역습하여 왜경 부지휘관 사방이하 30명을 사살하는 등 격전을 거듭하였으나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동월 31일에 홍주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공은 재기를 도모하기위하여 청양 축치에서 400여명의 의병을 수습하고 예산군 대지면 한곡리 전참판 이남규택에서 은거하면서 익덕일, 박창로, 곽한일, 이세선, 윤병일, 윤필구, 조의주 등이 경남, 전남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전북 무주군 적장산성곽을 근거로 일대 의거를 도모하는 한편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기초하다가 1906년11월에 공주탑산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큰 뜻이 좌절되고 말았다. 공은 동지 김덕진외 10여명과 함께 송주지부를 거쳐 1907년 7월 2일에 평리원으로 압송되었으니 재판결과 총대장 민종식에게는 사형을 중군장 황영수, 정재호, 참모장 곽한일, 참모 이용규, 김덕진, 향관 박윤식에게는 각각 종신형이 선고되었으나 당시 법무대신 이하영의 진청으로 내각회의에서 공에게 한등급 감형결의하여 진상하니 동월 4일에 재가를 받아 공 이하 모두가 유배되었다. 공은 전라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2월 3일에 고종황제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나 혹형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1917년 6월 26일에 57세를 일기로 서하니 공의 한은 지하에 서렸다. 조국이 광복되자 국가에서는 공의 공적을 기리 빛내기위하여 1963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고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에 있던 묘소를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오호라 공이 창의한 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