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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인 민공의 휘는 종식이요 자는 윤조며 호는 퇴초자이니 서기 1861년 경기도 여주군 주내면에서 판서 민공영상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유년부터 영민한 재질과 강인한 의자를 지녀 장차 대성할 자품을 보이더니 20세 약관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96년에 국모 민비시해의 참변을 당하자 스스로 고간직을 버리고 향리인 충청도 정산에 은거하니 조야에 그 덕망을 칭송함이 높았다. 갑오이후 정국이 날로 그릇됨을 항시 비문강개하더니 무오년간에 동지를 규합하여 국권회복의 높은 뜻을 품고 있던 중 을사오조약이 늑결되자 다시 상경하여 지기인 김복한, 김상덕, 이설등과 같이 해약상소를 봉정타가 일흉 이등박문에게 빼았겼다. 비분한 공은 즉시 정산 향제로 내려와 항일투쟁에는 의병활동이 최선임을 자각하고 1906년 3얼 동지를 규합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무기를 구입하는등 의거를 준비한후 청양, 보령등지에서 모집한 250명의 의병으로 동년 5월 11일에 홍산지치에서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남포, 보령, 함천군을 차례로 습격함으로써 많은 군기와 인마, 금품을 노획하고 의혈민중에게 창의에 동참할것을 호소하니 남포군수, 보령군수등 지방관과 수천의 용사가 운집하고 이세영, 정재호, 곽한일, 유준근, 이용규, 채광묵, 박윤식, 김덕진, 화영수 등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