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page


44page

이송되었다가 해귀되었다. 귀향후 공은 국권회복의 지름길은 교육에 있을을 자각하고 1906년 실제 창영지기 이상린등과 더불어 이곳 적곡면 관현리에 설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직을 맡아 인재양성에 전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독립의군부 충청, 전라, 경상 3도 사령관 책임을 부여받고 국권회복에 진력하는 한편 순종의 밀명으로 전국에 대거 의병을 모사하던중 미성에 발각되어 중국으로 망명 신흥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만주 교포청년교육에 헌신하였다. 후에 이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고 군사교육에 역점을 두고 조국광복을 위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공은 상해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암탄을 맞고 여생을 병고로 시달리면서도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중국 사천성 성도에서 72세로 서거하니 시신이 머나먼 외국땅 성도에 묻쳤다. 이제 조국이 광복된지 반세기에 이르렀건만 유해는 상기도 환국하지못하고 있으니 애닯기 그지없다. 정부에서는 한평생을 조국광복과 후진양성에 몸바친 공의 빛나는 공력을 추앙하여 1963년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이렇듯 공의 항일 투쟁의 발자취와 숭고한 보국충절의 정신은 천추에 귀감이 될것이다. 여기 가신 님의 유지를 받들고자 시임 심대평 충청남도지사의 배려와 군민들의 성원을 받아 성명학교 옛터에 공의 공적과 함께 스스로 창립한 성명학교존안에서 위국가를 발화하여 그것을 빗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44page

爲國歌(위국가) 천강생민하오시니 신자병순이 아닌가. 요순우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