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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李世永, 1869~1938)은 1906년 민종식, 채광묵, 안병찬, 박창로 등과 홍주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이세영은 서울로 압송되어 1906년 종신유형 선고를 받고 황해도로 유배되었다. 1908년 유배에서 풀려나자 거주지인 적곡면 관현리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전념했다. 그는 육영사업에 힘써 1908년 4월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교육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시켜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기 위하여 성명학교를 세웠다. 성명학교는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이상린을 비롯해 44명의 임원과 88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으며 측량과를 설치해 측량기사를 육성하고, 교육사업 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들을 실행했다. 성명학교는 일제가 민족교육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사립학교령에 의해 정식 인가를 받지 못했으며, 1909년 3월까지는 존속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폐교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