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page


36page

애국지사 한공 태석 사적비 지사 청주인 한공의 휘는 태석이요 자는 학초이니 1876년 1월 5일 청양군 사양면 흥산리 신촌에서 고 휘 성교공과 비 창녕성씨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고려개국공신 태위공 휘 란이 시조이시고 조선 세조 좌의정 양절공 휘 학은 17대조가 되신다. 유시부터 엄한 가풍속에 학문을 돈독히 하더니 성년초에는 이미 경향각지를 빈번히 왕래하면서 당대 석학 거유들의 교훈과 척사위정의 이념을 굳히는 한편 신학문에도 관심이 깊어 향리구가를 기독교선교사업에 헌납함으로써 신문화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 일제의 총검아래 을사보호조약이 늑결되자 일의호곡을 불금하고 구국운동을 모색하던중 1906년 4월 18일 전참판 민공종식이 홍산에서 거의하자 청양지방의 의병들을 이끌고 혼현이 그 막하에 들어가 용전하였고 다음달 19일 재거하여 홍주성을 탈함함에 있어 실제 우석 별명 훈공과 더불어 왜군에 항거한 혁혁한 전공은 일군마저 경악케하였으니 당시에 공이 호서장사로 불리어졌음은 그 뛰어난 용맹에서 연유함이었다. 1913년 공복회에 가입하고 각 도의병을 교섭하여 채기중등 항일의사들과 함께 풍기에서 광복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름도 모두가 열혈한 애국애정의 발로에서 배려된것이었다. 최선의 소왜방책에는 풍족한 자금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공은 스스로 다시 전재산을 처분하여 광복단에 지원함으로써 박상진등 대구세력과도 함류 강화케 되어 항일운동의 대단원을 이룩하였다 이에 19196년에는 노백린 김좌진장군등 태두들이 연속 가세하게되니 광복단은 만주독립군으로 또는 상해임시정부로 그 활동무대를 확대하면서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1929년에 실제 훈공이 출옥하자 공은 논산군 강경읍에서 신문지사를 위장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의 지하거점을 마련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데 전력을 다하다가 이해 11월에 대덕군 기성면 용촌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8년간 옥고를 치렀다. 형기를 마치자 청양군 적곡면 분향리 우거에서 혹형의 여독으로 고생하면서 와신상담의 나날을 기약하던중 1945년 조국광복의 기쁨을 누리다가 1949년 10월 15일에 영면하니 공을 기리는 이들의 호곡이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