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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배척하고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1906년 3월 하순 의병을 지휘하여 홍산으로부터 초발행군하니 홍산에서 제1회 작전하고 비인에서 제2회 작전하고 남포에서 제3회 작전하고 광주에서 제4회 작전을 거쳐서 홍주성에 돌입한 뒤 시기를 기다리던 차 익년 음 4월 18일 전 참판 문종식을 대장으로 홍산에서 기병하시니 이래 남포 보령을 거쳐 홍주성을 공략하며 공은 시종 ?관이 되어 의군의 전력을 드높였으나 미구에 간세의 밀통으로 적의 대군이 4위로 협습함으로 일대혈전 끝에 익월 7일 부득이 기성하였다.이때에 흘린 피가 성벽을 물드렸으니 시산은 곧 오늘날의 구백의총이라 분격한 의군 수령들은 신례원에 집결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친일 일진회의 끈질긴 침란으로 반위피집되어 평리원 심판으로 종신 유배되었으나 고종황제의 특지로 1년만에서 해금귀가하니 그 후로는 왜경들의 현혹이 연일 부절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정면반대함으로 일경에 연행되어 방광과 수족이 불인함을 무릅쓰고 파옥도주하시고 미래 부여 공주 등지로 은신타가 때로 동지 연락이 필요할때면 폐인을 가장 왕래하며 끝까지 조국광복에 헌신하시더니 1939년 을묘 1월 29일 전북 군산시 미원 정한사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서거하시다. 나라에서는 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77년에는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하였으며 유자로 희보 희성이었고 희보 자는 재석 재은이고 재석 생남에는 만진 자는 순필 순철이다. 배 안인 인천이씨는 1869년 을사에 출생하사 갑인 4월 14일에 졸하시니 부군지묘에 합폄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