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page


31page

청주인 한공 휘 우석은 별명이 훈이요 호가 송촌이니 고려개국공신 태위공 휘 난을 시조로 하여 서기 1890년 3월 27일에 청양군 사양면 흥산리에서 휘 성교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니 애국지사 태석의 아우가 된다. 공은 5척 단구에 총명대담하고 침착한 기품을 타고 았으니 유년부터 주위의 갈망속에 학문에 정진하더니 성장하매 일찌기 이 고장 칠갑산에서 일군과 항쟁하다가 전사한 의병인 숙성씨의 유언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국권회복에 헌신할 의지를 굳혔다가 때마침 합천에서 일본군에 패한 홍주의병장 참판 민종식이 보령 청나에서 도지를 규합하여 재거를 계획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홍주의병진에 참가하여 1906년 5월 19일에 일군이 점한 홍주성을 탈함하였고 의병소모장이 되어 각지의 의병을 홍주의진에 소집하여 1000여명의 대부대를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공은 윤이병, 나철, 기산도, 이상학등과 을사오적을 주참하려다가 나철, 기산도등이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산, 공주등지 에서 의병으로 항재하다가 친일노 곡산군수를 살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경술국치로 일제가 식민무단통치를 강화하여 우리 민족을 압박하자 공은 다시 1911년에 귀국하여 다음해에는 일찌기 순창의거로 체포되어 최익현과 같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