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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천품이 순정하고 청명하여 유시에 부친 인재공으로부터 수학하였을뿐 홀로 경학과 사장에 정진 선말 호서의 거유라 추앙되었다. 공은 내성외왕지도로서의 유학의 진수를 몸으로 익혔기에 빈한하되 부귀에 무심한 군자의 기품으로 여민감화 후진배양에 심혈을 경주하시다가 국운이 쇠미하여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할때 분연히 일어나 우국지사들과 국권회복에 진력하셨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이 발생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여사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할 의거를 결의 홍주지방의 김복한 이설 안창식 안병찬 이근주공의 백씨 증수등 제 지사들과 거사를 결행하려고 하였으나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차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던 홍주의진이 재조직되어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항전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공은 홍주의병활동에 전말을 소상히 기록하였으나 그것이 유명한 홍양기사로서 후일 의병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될뿐아니라 난세를 당하여 위정자와 국민 모두 구국제민위한 참인간?의 길이 무었인가를 천명하여주는 지침서라 하겠다. 정히 공자가 주말의 난세를 당하여 이를 바로잡고 ??의 기강을 세우고자 노사인 춘추를 저작한 그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여 전민족이 독립만세를 절규할때 미국대통령 윌슨이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열고 민족자결을 선언하니 김복한지사는 공과 더불어 사태를 논의하고 영남유림 백여명과 연락하여 왜적의 만행과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토로한 장서를 전달한바 이것이 왜적에게 발각되어 공은 5월에 체포되니 공주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에서 고초를 겪으시다가 7월 29일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집행유예 2년의 선고되었다. 정부에서는 공의 공적을 기리어 1983년 광복절을 기하여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서양의 물질만능주의와 타락된 정신침략으로 인도가 실추되어 국사가 다난한때를 당하여 공의 고귀한 학덕과 애국애정의 일단을 이 비에 새겨 길이 국기를 다지는데 명람을 삼고자 비재한 말학 사양끝에 이 글을 찬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