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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의 정기가 모인 오서산이 굽어보는 이곳 물안이 마을은 조선초 명현충신의 얼이 전해져 많은 독립지사들이 배출되었다. 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한 1.2차 홍주의병이 봉기하자 임승주지사와 홍양기사를 저술하고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임한주지사 형제 그리고 물안이마을 청년들은 신정리 출신의 안병찬지사와 함께 국권을 지키고자 의병항전에 나섰다. 물안이 주민들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총독의 포고문이 전해졌음에도 4월 5일부터 전개된 화성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기러기재와 황새봉을 옮겨다니며 함성이 우레처럼 울리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임상덕, 임한영, 임준호, 김용옥, 김만식, 안두종, 윤상진, 하래선 지사등 독립지사들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임상덕지사는 태형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임경호지사는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출하는 특사로 활동하고 비밀결사단인 동아흥산사의 국내 조직책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임긍호지사는 일본에서 수학중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교민단의 의경대원과 한혈단의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렇듯 이 마을 선열들의 혈성이 모여 광복을 쟁취하였으니 충의 정신에 빛나는 그 이름 길이 청사에 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