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page


140page

청양군 화성면 수정리 583-13 임한주 선생의 기적비를 찾아왔다.
140page

임한주애국지사는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와 같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고 의거할 것을 결의하였다. 홍주지방에는 김복한·이설·안창식·안병찬·이근주 등의 지사들이 있어 일본의 침략적 행동에 분개하고 있었다. 임한주는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고 홍주부 관찰사로 있던 이승우의 협조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차일피일 거사를 미루어 갔다. 이때 대흥·정산 그리고 청양의 지사들과 함께 의논하여 병력을 홍주로 집결하기로 의논을 정하고 1896년 1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이세영·이봉학·송병직·이상린 등이 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홍주성으로 입성하니, 이승우는 자진하여 '홍주목사 겸 창의 대장'이 되어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었다. 그리하여 17일 김복한을 주장으로 하는 홍주의진이 구성되었으나 대부분의 인사들이 소모활동차 홍주를 떠나 있을 때, 이승우는 성중에 남아 있던 김복한과 이 설을 구속하고 의병관계 인사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로써 1차 홍주의거는 무산되고, 많은 우국지사들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차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던 홍주의진이 재조직되어 홍주성을 점령하고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적의 끈질긴 공격에 결국 패하고 홍주의진이 무너졌다. 임한주는 그후 홍주의진의 활약상을 담은 '홍양기사'를 저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발발하자, 영남유림 곽종석·김창숙 등이 주도한 파리장서에 김복한과 더불어 서명하고, 이 일이 일제에게 적발되어 5월 체포되었으며, 동년 7월 29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