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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주 애국지사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김복한·이설·홍건·안창식·안병찬·임한주 등과 함께 홍주의병을 일으켜 일시에 그 성세를 드날렸다. 이에 이들이 주동이 되어 각 군면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소모해 수백 명씩 홍주성으로 집결시켜 연합의병을 지휘, 주도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마지못해 거의에 동참했던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변심으로 12월 4일 김복한·이설·홍건·안병찬 등과 함께 피체되어 구금되었으나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임경호 애국지사는 임한주의 손자이며 한말 의병장 김복한의 문인이다. 1919년 김복한·김덕진·안병찬 등 호서지방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목적으로 일제의 죄상을 폭로하고 조국독립의 열망을 담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자 임경호는 독립청원서의 발송책임을 맡아 황일성·이영규·전용학 등과 함께 발송을 준비하였다. 한편 영남지방의 유림들도 곽종석·김창숙·이중업을 중심으로 같은 목적의 독립청원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유진태의 소개로 김창숙과 만나 양측의 목적이 같음을 확인하고 영남측의 준비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호서·영남지방 유림 137인이 서명한 독립청원서가 확정되었으며 김창숙은 이를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송달하였고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이때 그는 독립청원 이후의 국내활동과 국외연락에 대비하여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지 않고 후진으로 남아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국산품 애용을 통한 민족자본의 양성과 민족자립을 목적으로 1923년 1월에 결성된 조선물산장려회에 참여하여 20명의 이사 중 일원으로 선전부에 소속되어 동회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23년 7월 이종린·송진우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동회의 기관지 발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동년 11월 기관지 ≪산업계≫를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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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공훈록에 의하면 임경호선생이 임한주선생의 손자로 되어있다. 하지만 비문에 의하면 손자가 아니고 조카가 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