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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조선의 기운이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조를 지탱해준 유교적도덕이 통제력을 잃어 국민정신은 해이해지고 산업은 위축되었습니다.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권신의 횡포는 무소불이하고 향반의 수탈과 유적의 행패는 그 도를 넘어 국민들은 생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이때에 영남의 수운대신사 최제우께서 중생을 구하려 인내천 종지의 동학을 창도하시니 새 시대의 희망이라 믿는 교도가 구름같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해월신사 최시형의 명에 따라 호남의 전공봉준이 제폭구민과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동학혁명의 횃불을 들어 고부에서 기포하니 그 세 기름에 불붙인듯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습니다. 이때 호서에 한 위인이 있어 그 분이 바로 이자리에서 나고 자라온 민족의 귀감이 되신 박공인호 이십니다. 공이 가신지 반백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공의 위업을 밝히고 추모하여 후학의 지남으로 삼고자하여 비를 세웠고 그 공을 기리는 바입니다. 공은 1855년 밀양인 박공명구와 온양 방씨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천성이 총명성실하시고 담력이 남달리 건장하셨으며 부군의 근엄하시고 방정한 덕성에서나온 가규를 이어받아 십년을 하루같이 의관을 불해하시고 어육주림을 단절하시며 낫자루를 베개하시여 와신의 지성으로 독공하였습니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생가하는 바가 없으셨고 한번의 실수는 두번다시 되풀이 하시지 않았으며 하고자하는 바가 중도에서 그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만인의 장이 되실 품격을 닦으셨던것입니다. 29세에 보국안민의 큰 뜻을 품고 동학에 입도하셨고 41세에 제포구민 척양척왜의 일념으로 덕포칠천 동학군으로 충청도에서 기포하시니 그 세 오만을 넘어 형천하였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일병과 옥천에서 승전목, 예산의 신예원접전을 마지막으로 후일의 기약을 안고 출사의 기를 내리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외세의 개입으로 갑오혁명이 좌절되자 1904년에 의암성사 손병희의 밀명에 따라 갑오혁신운동을 전개하는데 크게 공헌하셨습닉다. 그후 의암성사 손병희를 모시고 민족항쟁의 대장정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모든일을 한치도 어김없이 성사의 지도를 받아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현도하고 교단을 정비하는데 지대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이에 교세가 3백만이요 대교구가 36개소요 교구가 수백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종학원을 세워 교역자를 양성하시고 성미제도를 마들어 인적 물적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또한 계몽사업의 대종은 육영만한것이 없음을 깨달으신 의암성사의 명에 따라 공은 보성전문학교, 보성중학교,보성소학교를 인수 경영하고 동덕여학교와 경향에 유명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제정에 허덕이는 수십의 학교에 보조를 주셨습니다. 한편은 문자매체의 대중화를 위해서 보성사를 경영하여 문화의 대중화에 힘쓰셨고 만세보를 발행하는등 대중교화에 힘써 내것을 찾고 알고 가꾸고 지키는 의식을 키우는데 만반을 기하셔서 민족자존의 역사적 과제에 정진함으로써 민족종교의 기틀을 다지고 과시하게되었던것입니다. 이로써 공의 역량이 온무리를 뛰어 넘으니 54세에 천도교 대교주로 승통되시어 새로 펼처지는 민족개화독립운동에 활력소를 불어 넣은것입니다. 이에 1919년의 3.1운동에 앞장섰던 공은 48인의 한분으로 피검되어 옥고를 치루셨고 출감후 계속 사회개혁과 독립운동을 음양으로 지도하시어 3.1운동이후 천도교는 잡지 "개벽"을 발간하여 대중교화에 힘썼고 "?천"을 발간하여 ?계몽가에 힘썼으며 "어린이"를 발간하여 민족개조의 대역사를 소리없이 진전시켜 나갔던것입니다. 공은 한번 손을 댄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