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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 석오 이동녕 제 선배 밑에서 광복을 주모하다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연통제 비밀조직에 가담하였다. 승평 6대주를 의미하는 평주라는 아호는 이 무렵 성재 이시영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29세에 환국하여 김상옥 열사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고 풀린 뒤에 신사상 연구회를 통하여 신사상의 보급에 주력했으며 곧이어 언론계에 투신하여 동아일보 조사부장과 시대일보 상무이사를 거쳐 민세 안재학 월봉 한기악 두 분과 함께 조선일보사의 경영에 착수하여 이사 겸 경영국장을 맡았다. 한편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를 발기하여 막후에서 강령 및 제 규정을 만들고 선전부 총무간사로서 실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의 경력은 항상 일제의 감시를 받아왔거니와 1945년 3월 예비검속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 8.15 해방 때에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다시 건국 사업에 분주하게 된 공은 조선 국민당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제 정당에 직책을 갖게 되고 민주일보 부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 분단과 사회 혼란속에 그릇되어가는 현실과 타협할 수 없어 1948년 호연히 향원으로 돌아왔다. 6.25 난중에 장남 장원이 해병장교로서 전사한 뒤에 차남 문원이 중앙대학교수로서 효성으로 봉양하더니 1978년 10월 31일 서울 강남구 방배동 우사에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부인은 양천허씨이며 자녀는 2남 3녀이니 남은 장원 문원이고 녀는 숙원 예원 희원이다. 오호라 공의 무덤은 곧 수당 유재 두 어른 영하이니 조자손 3대의 높고 거룩함이 이 비역의 만년의 안고를 기약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