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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帝韓)의 일월이 장차 황대로 기울어질때에 수많은 순국절 열사가 있었으나 수당 이남규 선생의 한 집안처럼 격렬한 일은 없었다. 수옹이 광무 11년 8월 19일 온양 평촌에서 놈들에게 우해하였을 때 아들 충구는 순부하고 2노3비가 모두 의성을 떨쳤다. 충구의 자는 응부요 호는 유재요 통덕랑이니 고종 갑술 8월 4일 서울 낙동에서 났으녀 임진 감해에 합격하였고 물헌 이명익에게 사사하여 문사가 일진하였다. 병오에 민종식을 숨겼다 해서 적이 수옹을 공산옥에 갇우고 갖은 협박을 자행하는 한편 공에게 고형을 더하여 거의 운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다음해 평촌의 변이 창졸간에 일자 공은 두 종을 거느리고 몸으로 수옹을 가리었으므로 2주1노가 동시에 병명하였는데 다만 한종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까닭으로 당시의 일을 말할 수 있었다. 공의 사람됨이 견확강명하여 초연히 풍절이 있었으며 향년이 겨우 34세였으나 문고 몇 권을 남겼다. 공의 묘는 두 번이나 옮겨 마침내 예산 선영 밑에 안장되었다. 그 선계는 려한 2대에 문장 환업이 대를 이었으나 수옹의 갈에 이미 상세히 실렸으므로 이에 서는 생략한다. 부인 전주이씨는참봉 희민의 딸이니 아들 승복 창복을 두었고 사위는 신영호이다. 승복은 2남 3녀이니 장남 장원은 천하고 문원은 교육학 박사요 녀는 숙원 예원 희원이다. 창복 또한 2남 3녀이니 남은 행원 호원이요 녀는 양원 현원 인원이다. 지난 임자 봄에 불녕이 공의 묘명을 지었으나 순한문이어서 읽기 어렵고 또 무오에 항왜의 훈으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므로 이제 문원군이 다시금 불녕에게 글을 청하기에 이와 같이 엮었다. 진성 이가원 근찬 안동 김충현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