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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堂 先生 韓山李公 南珪 之墓(수당 선생 한산이공 남규 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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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李南珪)는 충남 예산 사람이다. 본은 한산(韓山)이니 목은(牧隱)의 후예이다. 호직(浩稙)과 청송(靑松) 심(沈)씨의 맏아들로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尾洞)에서 태어났으며 향리는 예산(禮山)이다. 1861년 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서 일찍이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187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승문관권지부정자(承文館權知副正字)를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영흥부사(永興府使)·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 후 향리로 내려갔다.1899년 비서승 궁내부 특진관(秘書丞宮內府特進官) 함경남북도 안렴사(按廉使)를 제수받았으나 자핵소(自劾疏)를 올리고 향리에서 청소년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의 반일활동은 상소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893년 입도왜병척축소(入都倭兵斥逐疏)를 올렸다. 1894년 일공사 대조규개(大鳥圭介)가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자, 청절왜소(請絶倭疏)를 올렸다. 이러한 국난의 시기에 벼슬하고 있음에 대해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었던 듯한 서한을 남기고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폐후조칙(廢后詔勅)이 발표되자, 당시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지내고 있던 이남규는 다시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討賊復·疏)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광화문에 나앉으셔서, 선비와 백성들을 모두 앞에 불러 놓고 애통의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나라는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사람은 죽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망하는 것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더욱 망함을 재촉하고 그 남아 있는 것이 구차하며, 죽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더욱 죽는 것을 재촉하고, 그 사는 것이 구차하게 된다. 너희들은 원수의 적을 그릇 곁에 있는 쥐라고 생각하여 던져 때리기를 꺼리지 말며, 너희 몸을 엎어진 둥주리의 새알이라고 하여 그 패할 것을 미리 생각하지 말고,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짐의 분개하는 바를 대적하여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종묘사직의 욕을 씻게 하라'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동맹 각국들로서도 윤리 기강을 알지 못하고 적의 뒤를 따르는 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함께 분개하여 향응(響應)하여 더불어 일을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 이남규 이외에도 각 단체·개인들이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에게 전하여지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친일 각료들의 공작 때문이었다. 일은 점차 악화되어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청군신상하배성일전소(請君臣上下背城一戰疏)"를 올린 뒤 깨끗이 처신할 것을 결심하고 두문불출하였다. 1906년 4월 최익현(崔益鉉)이 의병 일으킬 것을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다가, 곧이어 민종식(閔宗植)이 의진을 일으켜 홍주(洪州)에 입성함에 그 선봉장(先鋒將)에 임명되었다. 이남규는 끝내 홍주에 입성하지 않았다. 이상의 제 형편을 고려해 볼 때 왕명에 의한 합법적인 길 이외에 의병활동에 몸으로 직접 참여하고자 할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홍주의진이 크나큰 피해를 입고 민종식이 그를 찾아오자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리고 민종식의 참모이며 그의 족친인 이용규(李容珪)의 청을 들어서 그의 집을 중심으로 홍주 탈환 작전 본부가 형성되어 1906년 10월 5일 거사할 준비가 갖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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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충남관찰사 김가진(金嘉鎭)의 명에 따라 10월 2일 일본 헌병과 관군 수십 명에 의해 포위 체포되었다. 이때 이남규 부자와 이용규·곽한일(郭漢一)·박윤식(朴潤植) 등이 함께 체포되었다. 적군은 대장 민종식의 거처를 확인하고자 무수히 고문하였다. 이남규는 자백하지 않고자 하였으나 아들 충구(忠求)가 고문에 못 이겨 혀를 깨물자 아들을 구하고자 하여 "민종식이 의리를 쫓아 절개를 세우는 것은 그 이치가 당당(堂堂)하지만, 충구가 형을 받아서 목숨을 끊은 것은 그 명목(名目)을 댈 데가 없다."하며 자백하였다. 그때는 이미 민종식이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갔을 때였기 때문에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적군은 민종식의 거처를 탐문하여 찾아냈다. 이남규는 홍주의진과 무관하다는 판정을 받고 풀려나왔다. 그러나 끝내 의진과 관계가 있다는 일진회원의 밀고가 끊이지 않자, 1907년 8월 19일 적의 군사가 그의 집에 파견되었다. 이에 이남규는 "나는 대부(大夫)이다. 죽을지언정 욕을 당하여 너희에게 포박될 수 있겠는가."하고 교자를 타고 가려고 하였다. 그의 두 아들이 쫓아 나오고자 하였으나 "너희가 나를 따라 죽는다면 집안은 어떻게 되겠느냐."하며 만류하였다. 그래도 그의 아들은 그의 뒤를 쫓았다. 온양(溫陽) 위암(巍岩)촌 냇가에 이르러 적군이 그의 아들을 칼을 뽑아 베고자 하니 이남규가 그의 아들에게 "서울에 가서 일의 결판을 기다려라. 어찌하여 함께 죽임을 당하고자 하느냐"하며 칼을 막아 손으로 잡아 다섯 손가락이 잘라져 땅에 떨어졌다. 이렇듯이 이남규는 끝내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투쟁에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아들 충구가 부친을 보호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두 부자는 함께 죽었다. 이에 교노(轎奴)인 김응길(金應吉)이 가마의 막대기를 뽑아 적군을 때려 죽였으나 그 역시 적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한 집안에서 충신(忠臣)·효자(孝子)·충노(忠奴)가 한꺼번에 나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