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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의사 사적지는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윤의사의 상해 의거와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이곳은 윤의사께서 태어나고 자란 생가(광현당), 성장가(저한당)와 사당, 윤봉길의사의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윤봉길의사께서는 1908년 6월 21일 도중도 생가에서 윤황과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4세에 이곳 성장가로 이사하여,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2학년때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하고, 그 후 최병천 서당, 성주록 오치서숙에서 수학하였으며, 15세에 배용순 여사와 결혼하였다. 스승 성주록은 본인의 호 매곡의 매, 성삼문의 호 매죽헌의 헌을 따서 매헌으로 아호를 주었다. 1926년 무식한 청년의 모표사건을 보고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을 한탄하며, 그 원인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단결하지 못한데서 연유한다고 생각하여 농촌 계몽운동에 나섰다. 1930년 망명 전까지 윤의사께서는 농촌 계몽운동으로 무식을 몰아해는 운동(야학, 윤독회, 농민독본 편저, 학예회), 가난을 몰아내는 운동(두레, 수네, 나무심기, 공동구입, 공동소비, 위천계), 단결하는 운동(부흥원, 원진회, 수암체육회)을 추진하였으나, 농촌계몽운동으로는 일제라는 큰 바위를 작은 망치와 끌로 쪼아내는 형국이라 한탄하여, 1930년 3월 6일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를 향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2년후 백범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의 폭탄의거를 결행하고, 동년 12월 19일 25세의 짧은 일생을 가나자와에서 총살 순국하셨다. 해방 후 1946년 윤의사 유해를 우리나라로 모셔와 효창공원에 안장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