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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德萬歲公園 造成 事蹟碑(고덕만세공원 조성 사적비) 사적을 기록하면 역사가 되고 역사는 쌓여서 문화를 이룬다. 선현들이 사실 기록을 돌 위에 새겨 오래 보존하려했던 뜻이 여기에 있다. 이에 우리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 만세공원이 조성되는 전말을 비석에 새겨 향토문화유산으로 남기려 한다. 만세공원터는 1919년 기미 4월 3일 한내장날에 고덕 봉산 덕산 삽교면 천합덕동의 내포주민 3천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헌병에게 무참히 짓밟히던 그의 거의 현장인 한내장터이다. 이 곳에서 인한수 의사는 의병의 칼날 아래 순국하였고 이를 목도한 항의 대중들은 만세소리로 왜병의 기세를 제압하였다. 이 의거사실을 기리기 위해 1976년 4월 2일에 고덕 봉산 덕산 삽교동 고덕 인근 주민들은 성금을 모아 인한수 의사 현충비를 고덕면사무소 앞에 세웠다. 이후 고덕면사무의 이전으로 인한수 의사 현충비가 대천리 장고개의 개인 소유땅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해오던 이만우 선생은 2002년 6월에 예산군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자 안의사 현충비를 만세순국현장으로 이전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찬용 당시 고덕면장과 계획하여 2003년 3월 11일에 4.3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및 고덕면지 편찬위원위를 구성하였다. 이의원은 스스로 고덕면지 편찬위원장을 맡고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으로 이명범 회장을 추대하여 문화사업추진단의 진용을 갖춘 다음 당시 군수였던 고덕 출신 박중순 군수로부터 옛 고덕 보건지소자리 135평을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탑 부지로 사용하는 승락을 받아냈다. 이만우 편찬위원장과 이명범 기념사업회장이 각 1천만원씩 출조하고 최병모 번영회장이 300만원의 성금을 내어 이를 기금으로 135평 대지 위에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탑을 건립하고 인한수 의사 현충비를 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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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3년 4월 3일에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탑을 제막하는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기획한 지 한 달 미만에 번갯불처럼 신속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만우 위원장이 기념탑 제막식 7일 전에 급박하게 필자를찾아와 기념탑 기의 제작을 강청하여 하룻밤 사이에 급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다. 기념탑 건립장소는 기미년 4.3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옛날 한내장터로 당시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가 있던 의거의 현장이라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었다.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탑의 제막식을 겸한 기념행사를 새 자리에서 성대히 치르고나자 이만우 위원장은 더욱 자신감에 넘쳐 고덕면지의 발간을 서두르게 되었다가 기념탑 기찬술의 인사를 핑계삼아 이찬용 고덕면장과 이제상 선생을 대동하고 간송미술관으로 필자를 찾아와 먼저 집필과 편집을 총괄해 달라는 청탁을 한다. 불상 연구와 겸재연구 사사연구 현재 연구불상 조성대학 강의 TV강연 간송미술관 정기전시회 준비 등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했던 필자는 절대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정을 말하고 정중하게 사절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찾아와 간곡히 부탁하니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우선 총사의 집필을 수락하니 이만우 위원장은 7월 25일 고덕면사무소에 고덕면지 편찬위원회 총회를 소집해 놓고 필자를 초빙하여 그 사실을 공표하게 한다. 주도면밀한 작전이었다. 이런 일에 대비하여 수십년동안 고향 관련 사료들을 눈에 띄는대로 뽑아 놓았었기에 감히 집필을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밤잠을 줄이면서 쉬지 않고 엮어내는 에 몰두했으나 2006년 12월 10일에 가서야 겨우 탈고할 수 있었다. 이도 이만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