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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국에서 구입하시었다. 왜경의 가택수색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1917년 경상도에 피신히시어 박상진, 채기중선생과 만나 광복회를 조직하고 그해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박상진, 채기중, 장두환, 경창순, 김좌한, 노백린, 김경태, 김재욱, 김재풍등과 전국에서 모인 300여 애국지사와 더부러 오인은 대한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함은 물론 오인의 일생에 목적을 이루지 못할시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수적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하기까지 절대불변하고 일심육력할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함이라고 피를 뽑아 맹서한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여 김좌한장군을 만주에, 노백린장군을 중국에 보내어 무관학교를 세우셨다. 대한광복회의 기호지방 책임과 군비조달 총책임을 지시고 세전전답을 팔아 괴산, 인천, 서울, 경주등에 연락소를 설치하고 국내외 동지들과 긴밀히 연락하는 한편 향제에서 전국 부호 160명에게 군비분담 통고문을 발송하고 동서사방 시눌귀몰하는 활동으로 많은 군비조달을 하여 만주와 중국의 광복군에게 보내어 왜군을 무찌르게 하는 한편 친일분자들을 응징하여 동포로 하여금 경각케하고 왜로 하여금 벌벌떨게하셨으며 2000만동포로 하여금 이제야 광복된다고 기뻐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동지의 가족의 잘못으로 1918년 1월 27일 박상진, 채기중, 김경태, 장두환, 김재풍, 김재욱, 김원묵, 김재인, 성달영, 정태복, 황학성, 이재덕, 성문영씨등 75인과 함께 체포되셨으나 그 모진 고문에도 입을 다문채 타동지들에 의하여 이미 밝혀진 사실이외는 불지않으셨다. 그러므로 의사의 투쟁상은 하늘만이 알고 전할길이 없음이 더욱 안타깝다. 1920년 9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되어 1921년 8월 11일(음 7월 8일) 형집행으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신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시니 고택 뒷산 배위묘에 합알하였다가 11977년 12월 20일 이곳에 옮겨 모셨다. 1945년 드디어 조국이 광복되고 정부는 영전에 건국공로훈장을 바쳤다. 예산모현사업회는 순국기념비를 예산역전에 세웠다가 향천리 충의공원으로 이건하였다. 배위 여흥민씨는 191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