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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들이 모여 들었다. 민참판은 을미사변때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재산을 털어 무기를 구입하는 등 왜적을 몰아낼 궁리만 하고 있었다. 안병찬 의병장이 통문을 만들어 돌리고 3월 19일을 기의날로 잡아 홍주성을 공략하기로 전략을 세웠으나 일진회원의 정탐으로 일이 누설되자 날짜를 앞당겨 3월 14일 비밀리에 광시장터로 집결하여 왜적을 토벌하려는 충천의 기세로 결전의 깃발을 높이 세웠으니 이것이 병오 홍주의병의 시작이었다. 총사에 추대된 민참판은 박창로, 성달영을 소모관으로 삼고 행군사마 안병찬 중군사마 박윤식, 운량관 성재륜, 유회장 유노근, 종사관 홍순대, 그 외에 이세영, 김덕진, 윤병일, 민정식, 김재정, 박재현, 채광묵, 이상구, 안항식, 신보균, 김기우, 성문영, 윤필영, 최상집, 황영수, 정재호, 안병림, 신현두, 이민학, 문석환, 박용근, 송순목, 김상진, 최상하 등 많은 참모급 인사들을 선두로 하여 홍주로 달려가 하고개에 진을 쳤다. 적정을 살핀 의진은 다시 광시로 퇴진하여 공격목표를 공주로 바구어 행군 도중 일본군이 청양에 와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에 따라 먹방이에서 행선지를 감포로 바꾸고 청양군 화성면 합천에 이르러 숙영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격전을 벌렸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때의 자세한 내용이 고광일기에 적혀있으나 일본군에게 빼았기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홍서의병 유족회의 노력으로 사료의 일부나마 발굴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아 세월은 흘러 병오년 의거도 어언 80년이 지나매 의병들이 집결했던 그 곳은 흔적마저 찾을 길이 없다. 괭이와 낫을 들고 왜군의 총칼 앞에 마주섰던 그날의 충혼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통일의 표상으로 삼고자 이자리에 돌을 깍아 세운다.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평화로울 때엔 장이 서서 세정을 나누고, 나라가 위급하면 가정을 박차고 나와 모이던 여기 구대의 옛 장터가 역사의 땅임을 다시금 상기하자. 그리고 옷깃을 여미어 가신 님들의 명복을 빌자. 서기 1987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