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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 네번 사직상소를 올려 사퇴하셨으니 가위 선생은 이 나라 선비 중의 선비셨다. 을사에 이르기까지 전후 십수차에 걸쳐 올리신 자강상소들은 기우는 이 나라를 붙잡으려는 마지막 의로운 경종이었고 1904년 국왕께 독대할 때 시국을 통곡하시며 국권의 자주와 일화 차관의 거부와 외세의존의 불가함을 눈물로서 간하신 이른바 오조신부는 그 충성어린 자자구구마다 귀신도 감읍케 한다. 1905년 봄 왜적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준비작업으로 국가 원로이신 선생을 왜 사령부로 왜헌병로 거듭 감금시켰으나 차라리 나라 없는 삶은 나라 있는 죽음만 같지 못하다는 선생의 저 청청한 의기는 왜적의 총칼로도 꺾지 못했다. 드디어 1905년 저 을사조약으로 이 나라 천지가 밖기고 이 겨레의 역사도 닫히려 할때 74년간 한번도 꺾임없이 지켜왔던 선생의 마지막 얼은 그 불굴의 의에 분노의 불을 당겨 겨레 위해 타는 의병민족운동의 횃불로 피어올랐다. 조약폐기와 오적참살의 분노를 상소로 외치시고 초적의 대의를 밝혀 병자수호조약 이래 일제의 죄상을 낱낱이 꾸짖는 기 일본 정부 서를 왜공사관에 보내신 다음 온겨레의 항일 봉기를 호소하여 포고 팔도사민의 격문을 뿌리셨다. 30여년 쌓여온 일제의 침략상을 파헤친 저 16개조 토죄문은 왜적의 간담도 서늘케 하였고, 자주대한의 민이여 적에게 굽히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애국을 앞세워 싸우며 죽자는 저 포고문의 귀절에서는 민족의 피가 끓어 올랐다. 그러나 당시 이름있던 사람과 당상들에 보냈던 눈물의 거의 호소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자 선생은 드디어 1906년 윤 4월 호남땅 태인에서 우선 임병찬 등 문인들과 더불어 의로운 기백을 꽂으셨다. 수개월간 수십차의 혈맹으로 더욱 불어난 선생의 의진은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임종규, 양재해, 조우식, 조영선, 최재학,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 등이 이른바 13의사를 비롯한 의군 800이었으며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전라 일원을 누빈 구려 항쟁 끝에 다시 순창 땅에 들어왔을때 왜적 아닌 동포 진위대의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애닲다. 포위한 적이 어찌 왜군 아닌 동족일 줄 았았으랴. 이에 선생은 차마 동족상멸 상의 비극을 펼 수 없어 의병에게 총질을 멈추게 하셨다. 여기서 젊은 의사 정시해는 총탄에 맞아 쓸어지고 순의를 기다리며 끝까지 선생을 모시던 13의사도 포박을 받고 말았다. 아! 선생의 충절에는 이같이 의가 따르고 인이 넘쳤다. 선생께서는 보이신 그 충과 절과 의와 인에서는 바로 이 겨레의 새로운 생명력이 이어져 나왔으니 춘추의 정신은 오늘도 병오년 선생의 의병을 의연히 우리 한민족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전라의병에서만이 아니고 홍주의 민종식 의병에게는 문인 의사 일단을 파견 그 세를 독려하셨고 강원, 충북에서 오래 계속되었던 저 유인석의 의병운동도 끊임없이 지도 격려하셨으며 또 선생의 의병 뒤에서는 문인 노응규 등 수많은 우뚝한 의병들이 줄이어 따랐으니 실로 선생은 한말의병의 총사요 광복운동의 원훈이셨다. 의병에 패하신 후 선생은 적지 대마도에 갇히신 몸으로도 적이 주는 한 알의 쌀과 한 모금의 물마저 물리치고 74세 일기를 들어 아사 순국으로 겨레 앞에 바치셨으니 때는 1906년 음 11월 17일 새벽 하늘에 일성장명도 함께 떨어지던 인시였다. 오호 선생이 가셨을때 조선왕조도 막을 내렸고 오백년 이 나라 사림의 명맥도 끊겼다. 물 한 모금마저 물리친 충은 송의 문천상보다 더하고 외적에 저항하신 의는 려말의 정포은과도 다르며 무장 아닌 선비로서의 거의 순국은 조중봉과 이충무공 이후 이 겨레 항일투쟁사에 큰 한 빛을 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