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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겨레 4000년 역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말 외세로 나라의 운이 기울고 침략으로 겨레의 명마저 끊이려 할때 이 겨레에는 한 큰 별이 있어 이울어가는 그 역사 위에 마지막 우뚝한 광망을 던졌으니 이제 그 빛을 기리어 우리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춘추의 얼과 충의의 자취를 삼가 여기에 싣는다. 선생의 성의 최, 휘는 익현, 자는 찬겸, 호는 면암이시다. 라말 거유 최치원의 후예이시다. 1833년 경기도 포천현에서 가난한 선비 휘 대의 아들로 태어나시어 1906년 적의 땅 대마도 인관에서 굶어서 순국하시기까지 실로 선생이 걸으신 74세 일기는 그대로 파란 많은 우리 근대사의 별장 바로 그것이었다. 일찌가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위국위도의 큰 뜻을 닦으셨고 오직 봉양의 효성으로 세우신 출임에의 길이 명경문과에서 순통으로 급제하였을때 이미 이효사충 진충보국에의 높은 지조를 굳게 다짐하였다. 1855년 승문원 부정자에서 출발된 선생의 관직은 순경원수봉관, 사헌부시평사, 연원정언 이조정랑, 신창현감, 사헌부 장령, 돈녕부 도정승정원증시 등을 거치는 동안 숱한 위공애민의 의표를 남겼으니 양민을 괴롭히는 감사의 명에 따를수 없어 홀연히 신창현감의 관직을 버렸을 때 길을 맊고 원류하는 백성들의 가슴속에는 선정목민의 산 표본을 남기셨으며 사헌부 장령시에는 감연히 당시의 비정을 비판하는 시폐4조 상소를 올림으로써 세도정치로 맊혔던 조선조 언관의 기백을 다시 떨쳤다. 고종 10년 서슬 푸른 대원군의 세도를 꺾었던 저 유명한 계유년 상소는 이땅에서 처음보는 입기명륜의 드높은 기상이었으며, 1876년 일제가 힘으로써 불평등한 병자조약을 강요하여 왔을때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저 척화오조상소는 나라의 자주와 민족의 생로를 외치신 높고도 푸른 춘추정신의 발현이었다. 그 후 선생은 공조판서,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 등에 임명되시고 1902년 정헌대부에 올르신 후 다시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였으나 이를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