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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고 이어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그 해 4월에 부여 내산 지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산 서천 판교 웅천 남포 보령 광천 결성을 거쳐 홍주서을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니 당시 우리나라 항일 의병 운동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이 두번에 걸친 민종식의병진에 의사는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기꺼이 참여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진의 세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역할이었기에 세상에 명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의병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피신하였지만 의사를 비롯한 140여명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홍주에서 3일간 혹독한 심문을 받은후 그 가운데 의병활동의 중심에 섰던 78명은 다시 경성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되어 2달간 투옥생활을 하면서 또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사를 비롯한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등 9명의 의사들은 대모도 유배형을 받고 그 해 8월 대마도 이즈하라 경비대에 끌려가 낮선 이국땅에서 언제 고국에 돌아갈지 모르는 기약없는 기간의 고생을 하면서도 저들의 협박과 회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으니 이들은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특히 의사는 1년 전 아들을 잃은 슬픔과 9명의 의사중 58세의 최고령으로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더욱 컸겠지만 꿋꿋이 견뎌내었다. 얼마 후 면암 쵝익현도 대마도에 끌려와 함께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의사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74세의 최익현을 예를 갖추어 극진히 간호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상복을 입고 애도하였다. 그러다가 몇 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의사는 고령으로 체포된 후 왜병들의 혹독한 심문과 대마도 유배시 겪은 고통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 들어 고국에 돌아온 이듬해인 1909년(기유년) 12월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항일의병운동에 뛰어든 의사의 충의와 대마도에서 끝까지 지킨 의사의 절의는 열렬하고 뚜렸하여 마땅히 세상에서 사모하는 바가 되어 비록 백대가 지난 뒤까지도 그 이름이 잊히지 아니하고 죽었어도 오히려 산 것과 같이 했어야 함에도 의사 사망후 100여년 동안 알지도 못하고 세상에 알리지도 못했으니 의사는 천하 후세에 할 말을 할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