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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 1905년 12월 고군산도에 유배되였다가 우국충정을 인정 특별사면되여 법부 참사관에 임명되였으나 끝내 불복하시고 1910년 경술지변을 맞게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남하 마산에 은거하시면서 우국지사들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셨음. 2. 국채보상운동 일본이 을사보호조약 이후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시정 개선이라는 미명하에 1906년 일본 흥업은행으로부터 1천3백만원의 차관을 받아쓰게 하였으나 이는 침략을 위한 술책이엿음에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벗어나기 위하여 국채를 갚아야 한다는 일대 구국운동이 일어나게 되였다. 지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및 우국지사들에게 공한을 내여 국채보상운동에 동조할 것을 호소하니 이 운동은 전민족의 호응을 얻어 거국적인 민족구국운동으로 번지게 되였다. 이 운동의 발단은 당시 대구의 광문사 사장으로 계시던 김광제 지사와 동지 서상돈의 제창으로 시작되였다. 지사는 이 운동을 확산키 위하여 단연회의 조직과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발기하시고 국채보상 연합회의소의 총무직을 맡아 이 운동을 지도하시였다. 이 운동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3개월동안에 모금액이 무려 2백 31만원에 달하였으나 이 운동의 확대에 겁을 먹은 일본은 배일운동이라 탄압하고 간부들을 보상금 횡령이란 오명을 씌워 투옥하니 이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으며 후에 무죄로 석방되시였다. 3. 대한협회 구국계몽운동 한말의 독립단체이던 대한자강회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방 당한 후 자강회원인 독립투사이며 언론인인 신채호 장지연 남궁억 오세창 등과 함께 계몽지 대한협회 회원으로 계시면서 호남지방의 시찰원으로 민족자결을 역설하고 문화적 계몽운동을 통한 주권 수호와 봉건적 질서의 해체를 외치면서 구국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시였다. 3. 노동운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 3.1운동을 전후하여 조선노동대회 경성본부장 및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계시면서 전국각지의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