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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 등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그 요지는 대한민국 2천만 명이 담배를 끊어 담배값 20전씩을 3개월간 저축하면 1천3백만 환이 되므로 전국민이 3개월간 단연하여 그 돈으로 이완용내각이 일본으로부터 차관한 1천3백만 환을 갚아서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김광제는 동지들과 함께 대구에서 국채지원금수습사무소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 호응을 얻은 결과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하여 전국각지에 국채보상기성회,단연회 등의 조직이 결성되고 지원금이 답지하였다. 국민들의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는 매우 자발적이고 열성적이어서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담배끊기를 단행하였고 여성들은 비녀와 반지를 내놓아 이에 호응했으며,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이 운동에 호응하는 여학생들도 다수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전국각지에서 231만 989환 13전의 의연금이 자발적으로 모이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 크게 놀란 일제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안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총무 양기탁을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가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유언비어가 퍼짐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퇴조하였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전국 각계각층의 국민들을 애국운동에 직접 참여케 동원함으로써 그 후의 국권회복운동 고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압록강 대안의 동로홍묘자에 일신학교(후에 興東學校로 개명)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 1운동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3 1운동 일주년을 맞이해서 유학생들과 함께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국내 및 동경의 한국인에게 배포하고 제2의 3 1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사전에 일제 경찰에 발견되어 체포되었으며, 일인이 독살하였다는 풍설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